육영 외길인생… 현암 최현우의 삶과 교육보국<1> 고향과의 굳은 약속

*** 현암 최현우(玄巖 崔鉉羽) 선생은 교육백년대계를 위해 육영사업에만 매달려 팔십 평생 외길인생을 살아왔다. 올해 나이 86세. 경북대 법대 졸업반인 27세 때 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전문대학, 4년제 대학까지 학교를 설립한 그를 두고 지인들은 인간의 의지를 뛰어넘는 초인적인 힘으로 후학양성에 매달린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인재육성을 위해 온몸을 바친 현암의 삶을 8부작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 지난 1955년 경북대를 졸업하자 마자 교육계에 투신, 지금까지 교육사업에 전념하고 있는 현암 최현우 선생
1972년 4월 22일 오후 1시 영주전문학교(현 경북전문대학교)의 개교식이 경북 영주시 휴천동 630번지 교정에서 열렸다. 신입생 309명의 입학식을 축하하러 모인 사람이 무려 1만여명이나 되었다. 민관식 문교부장관, 김영희 경북대총장, 경북지역의 많은 석학, 교육담당 기자들, 지역출신 국회의원과 지역 기관장들, 주민과 학생들. 이렇게 많은 축하객이 운집한 것은 이 고장이 생겨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1542년 최초의 사립서원인 소수서원이 영주에 개원한 이래 430년 만에 사립대학이 들어서는 뜻깊은 날이기도 했다.
내 고향 영주에다 전문대학을 설립하겠다는 계획을 말했을 때 주변의 선후배들은 하나같이 학교를 세우려면 서울이나 대구에 세우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나는 대구에 경북공고를 설립할 때부터 기회가 되면 내 고향 영주에 반드시 대학을 세우리라고 다짐해온 터라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영주에 대학교를 세웠다. 그러기에 교정을 가득 메운 1만여명의 고향사람을 둘러보니 비로소 고향과 한 약속을 이루었다는 뿌듯함이 성취감과 함께 물밀듯 밀려왔다.

나는 너무 일찍 부모를 여의고 조부모 밑에서 자랐다. 어려서 홀로 되는 것을 한자로 고(孤)라고 한다. 그렇다, 나는 분명 고아였다. 나는 세 살도 되기 전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러나 그런 절해고도의 외로움 속에서 자라나는 나를 보살펴준 이가 있었으니 바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였다. 한학자인 할아버지께서는 오막살이에 겨우 풀칠을 하는 살림살이에서도 나를 공부시키는 데 주저하지 않으셨다. 나는 그런 할아버지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나무하러 갈 때도 책을 놓지 않았었다.

나는 영주에서 보통학교와 영주사범학교를 마치고 1년9개월간 봉화군에 소재한 재산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먼 미래의 자아실현을 위해 대구의 경북대에 입학했다. 그때부터 나는 후학양성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고향에도 반드시 대학을 세우겠노라고 맹세했다. 나는 경북대 졸업반이던 1954년 야간학교를 설립, 운영했고 이듬해인 1955년 경북공업기술학교를 설립하고 지금까지 교육사업에 전념하고 있다. 27세 한창 젊은 시절에 교육계에 투신하여 경북전문대학교를 비롯해 경북공업고등학교(1955년), 경구중학교(1961년), 중앙고등학교(1975년), 동양대학교(1994년) 등 5개 학교를 설립하였다.

내가 설립해 그동안 운영해온 경북전문대학교는 어느덧 경북 북부지역을 대표하는 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당시 훌륭한 교수님들을 모시기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대구로 서울로 차를 보냈던 기억이 난다. 교통편이 아주 좋지 않기로 유명한 이곳 오지까지 군말 없이 달려와 주신 교수님들 덕분에 좋은 인재들이 대도시로 나가지 않고도 제대로 된 고등교육을 받고 중견 사회인이 되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교육자로서 뿌듯한 보람을 느끼게 된다.

나는 1994년 내가 마지막으로 꿈꿔오던 4년제 대학교를 설립하였다. 바로 공무원사관학교로 더 잘 알려진 동양대학교다. 한여름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노무자들과 함께 영주에서 새벽 버스를 타고 먼지 가득한 건설현장을 다니면서 그들과 동고동락하며 대학교 강의실 건설에 매달렸다. 나이가 들어 청력이 떨어지고 당뇨 등 각종 노인성 질환이 엄습해와도 굴하지 않고 캠퍼스 조성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휴일에도 혼자서 학교를 둘러보는 것이 내 인생의 큰 기쁨이다. 거동이 불편해진 요즘도 나는 거의 매일 학생들과 더불어 등교한다. 두 귀를 쫑긋 세우고 강의에 열중하는 학생들을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나는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지금까지 나의 삶을 지탱해준 것은 바로 학교였다. 그 학교를 이루고 있는 교수진과 직원, 학생들은 나의 삶을 보람되게 만들어주는 소중한 분들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 1967년 5월 경북공고와 경구중학교에 그 당시로서는 대학에서조차 생소하던 ‘기획실’을 설치한 기억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더욱이 중고등학교에서 기획실을 둔다는 것은 당시 다른 학교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해오던 학교운영기구와 관리방식으로는 능률도 떨어질 뿐만 아니라 학교의 질적 발전에 아무런 기여를 못한다는 점을 간파했다. 급격하게 불어나는 학교의 시설과 학생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해서 최대치의 교육적 효과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기업경영에 적용되는 경영원리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학교운영에 소위 기업마인드를 접목하여 큰 효과를 본 것인데 이는 내가 석·박사 과정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덕분이라 아니할 수 없다.

▲ 동양대학교 본관과 현암정사

이제 스무 살이 되는 동양대학교는 내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다. 동양대학교는 아직 젊지만 그 이름만큼은 대외적으로 많이 알려져 흡족하다. 교육부로부터 3년 연속 교육개혁 최우수대학으로 선정된 것을 시작으로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의 많은 성과와 발전을 이루었다. 특히 소백산맥의 바람그늘 사면 산자락에 조화롭게 펼쳐진 캠퍼스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10대 대학으로 선정되었을 정도다. 지난 2007년에는 정부의 대학종합평가에서 6개 영역 가운데 3개 영역에서 최우수 대학으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내 인생 가장 자랑스러운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 경북전문대학교 본관
내가 살아오면서 삶의 지표로 삼은 것이 있다. 바로 자주·진리·봉사 이 세 단어다. 어릴 적부터 오직 할아버지 한 분 그늘 밑에서 자란 까닭에 나 자신을 지탱하는 자주정신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농촌의 그저 그런 평범한 농부로 성장했을 것이다. 나는 이 자주정신을 바탕으로 진리탐구에 매달리다시피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손에서 책을 놓은 일이 거의 없었다. 지식을 통해서 진리를 터득하는 데 재미가 들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터득한 진리를 나 자신의 입신영달보다는 육영이라는 길을 통해서 봉사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영주전문학교 개교식에서 학교장 취임사를 통해 자주·진리·봉사를 강조하고 학교의 교훈으로 정했다.
나는 육영사업을 하면서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던 날들이 오늘의 성장기반이 되었음을 새삼스레 실감한다. 고난과 시련의 기간이 있었기에 오늘의 발전과 번영이 더욱 값지고 보람되게 느껴진다. 경북공고 개교 30주년을 기념하여 발간한 <경공 30년사>에서 당시 나의 생각을 이렇게 적었다. 지금도 나의 이 같은 생각에 변함없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개척자에게는 내일의 영광을 위해서 오늘의 피와 땀을 바치는 근면과 인내가 필요하며 남이 못한 일을 우리는 힘과 의지로 해내고야 말겠다는 남다른 결의와 각오가 있어야 한다.”

■ 현암 최현우(玄巖 崔鉉羽) 연보
경북 영주시 상줄리 출생(1927.8.20), 영주서부보통학교 졸업, 영주농업중학교(6년제) 사범과 졸업, 경북대 법학과 졸업(1955), 영남대 경제학 박사(1975), 경북공업고등학교 설립(1955), 경구중학교 설립(1961), 영주전문학교(현 경북전문대학교) 설립(1972), 중앙고등학교 설립(1975), 동양대학교 설립(1994), 한국대학법인협의회 및 한국전문대학법인협의회 부회장, 한국사학법인연합회 이사 역임. 현암학원 이사장. 저서로는 <경제학원론>(1988), <국제경제의 이론과 현실>(1997), <경제학 강론>(1998)이 있다. 국민훈장 목련장 수훈(1993)

< 정리=한국대학신문 편집국 기획팀 >

*** 이 시리즈는 대학 창립자가 초기 건학이념과 고등교육 발전을 위해 교육현장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살아 있는 참 교육자’를 발굴, 소개하고자 16부작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저작권자 © 한국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