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동현 대전대 석좌교수(한국교양기초교육원장)

▲ 손동현 한국교양기초교육원장(대전대 석좌교수)
지난 30~40년 동안 한국은 ‘딴 나라’가 됐다. 사람 사는 방식이 달라졌고 사람들 생각이 달라졌다.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이 달라졌고 욕구의 내용과 그 충족의 방식이 달라졌다. 삶을 기획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정보화와 글로벌화가 이 혁명적 변화의 종합판이다.

이 문명사적 전환의 진원지는 역시 ‘디지털 혁명’이다. 이 혁명의 핵심은 다음 두 가지에 있다. 하나는 커뮤니케이션에서 시공 제약이 없어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유와 감각을 융합·호환하는 기술이 상용화된 것이다. 대학의 교육과정을 문제삼겠다며 왜 이런 얘기를 꺼내는가. 지식사회의 지적 지형이 달라졌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대학의 교육과정도 그에 맞게 변신해야 된다는 의미다. 융복합 교육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됐건만 그게 왜 필요한지, 그것이 노리는 융복합적 지적 능력이 왜 필요한지, 그 문화지형적 배경을 설명해주는 사람은 없어서 하는 말이다. 융복합 교육을 한답시고 융복합 과목 개발에 몰입하는 건 넌센스다.

짚어보자. 시공간적 제약의 소멸은 자연히 인간의 시공체험 양식을 변모시킨다. 시공체험 양식은 세계체험의 근본이다. 거리의 소멸, 시간의 증발은 놀랍게도 욕구충족의 순차성과 단계성을 뛰어 넘어 동시적 총체적 욕구충족의 가능성을 기대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는 기술의 융복합, 나아가 산업의 융복합을 불러온다.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야 기업이 이윤을 창출할 게 아닌가.

세상이 이렇게 변해가고 있다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어떤 능력을 지녀야 할까. 특정 분야의 전문적인 지식, 물론 그건 필요하다. 사회 영역이, 아니 직업세계가, 이렇게 세분화돼 있으니 그 각 분야에서 필요로 하는 지식을 습득해야 함은 당연하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지식의 창출·유통과 소비가 더 없이 원활해진 오늘의 정보사회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문제는 그 자체가 복합적인 것이다. 그 해결을 위한 지식도 복합적이지 않을 수 없다. 대학에서도 융복합적 지적 능력을 길러야 하는 이유다. 전문지식 못지않게 이 전문지식들을 연계시켜 주는 지적 연결 지평이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정보사회에서 지식사회의 지형이 분절형에서 융합형으로 바뀌어간다는 말도 이를 일컫는다. 동시적 총체적 욕구충족의 기대가 화근이라면 화근이다. 그러나 어쩌랴. 디지털 혁명이 이미 진행된 것을.

유감스러운 것은 한국 대학의 교육과정이 50년 전과 별반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다. 아직도 철저히 전공·학과 중심의 교육이다. 교수와 학생이 공속하는 ‘학과’는 대학의 성체다. 여기서 융복합 교육을 기대할 수는 없다. 융복합 교육의 기초가 되는 ‘교양교육과정’은 어느 대학에서나 대체로 찬밥 신세다. 게다가 교양교육은 ‘하면 좋지만, 안 해도 되는 것’으로 치부된다. 이 잘못된 천박한 통념이 한국의 대학사회에 남아 있는 한 대학의 국제경쟁력은 하위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노벨상이 ‘작전’ 짠다고 되는 일인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양교육은 사물의 본질을,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숙명을, 자연탐구와 기술의 본질을, 나의 삶의 의미를, 사회와 역사의 흐름을, 그리고 인간의 보편적 이상을 통찰하는 지적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다. 교양교육 없이 어떤 탁월한 지적 성취가 가능하겠는가. 대학교육은 지금 허허벌판과 같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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