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은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다고들 한다. 나날이 행복한 사람이 되려면 마음부터 열어야 한다고 말들 한다. 우리 시대 종교학 석학이 보내는 '소소해서 종종 잊곤 하지만 너무나도 소중한' 메세지 <정진홍의 살며 생각하며>에서 마음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만나보자. 

스무 서너 해 전 일입니다. 집안에 우환이 있어 병원을 꽤 오래 드나들었습니다. 나중에는 거의 한 해를 병원에서 환자와 함께 기거하기도 했습니다. 그 무렵 저는 처음으로 호스피스 봉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임종환자를 돌보는 봉사활동을 직접 보기도 했고 급기야 실제로 도움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윽고 병원을 다시 드나들지 않게 되자 저는 직접 임종환자들을 보살피는 일에 참여했습니다. 오래 하지는 못했습니다. 단단히 마음을 먹고 빚을 갚는 마음으로 열심히 했는데 생업을 유지해야 하는 일과 함께 하기에는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서너 달을 겨우 채우고는 더 잇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짧은 기간에도 여러 죽어감, 죽음, 그리고 주검을 마주하면서 참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삶이 저리도록 허무했습니다. 긴 서술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임종을 겪을수록 ‘이렇게 끝나는 건데 한 평생을 그리도 안달을 했던 걸까?’하는 느낌이 점점 진해졌습니다. 어떤 사람의 죽음도 다 그랬습니다. 남녀노소빈부귀천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죽음모습이 한결같지는 않습니다. 무척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불안 속에서, 또 두려움 속에서 죽음을 맞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의연하게, 그리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기도 합니다. 때로는 분노와 원망을 끝내 놓지 못하는 죽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묘사도 이제는 쉽지 않습니다. 의술의 발전 탓이라고 해야 할 텐 데 지금은 거의 모든 임종환자가 온갖 치료도구에 엮여 의식은 없지만 살아있는 주검인 채 유예된 죽음선언만을 기다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죽음모습이 제각기 다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임종의 현장에서 의도적으로 가려지거나 무심하게 덮여지는 ‘풍경’이 있습니다. 망자를 보내는 산자의 모습이 그것입니다. 애통하는 절규도 있습니다. 소리 없는 눈물 속에서 고이 보내는 따듯한 이별도 있습니다. 임종의 순간에 바로 그 자리에서 벌어지는 산자들의 악다구니도 있습니다. 죽음이 선언되는 순간 산자들의 표정이 마치 악몽에서 깨난 것 같은 가벼움으로 환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망자가 자기의 죽음을 어떻게 맞고 있는지를 그린다는 것은 비현실적이지만 망자를 보내는 산자의 모습을 그리는 것은 결코 비현실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를 누구도 드러내려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망자에 대한 산자의 반응은 그 둘 간의 관계, 곧 그 둘 사이의 혈연, 정(情), 이해(利害) 등의 친소(親疎)가 결정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은 산자의 삶을 위해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한 드러내지 않는 것이 나을 거라고 생각해서 스스로 가리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산자도 곧 망자가 됩니다.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망자 앞에서의 산자의 모습을 보면 대체로 자기도 또한 그렇게 된다는 것을 거의 모르고 있는 것 같기만 합니다. 다시 만날 수 없는 망자와 이별하는 예의가 어떠해야 할지를 알 법도 한데, 망자의 죽음이 자기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하다못해 자기도 후련하게 치워버릴 쓰레기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조금은 소심해질 만도 한데,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하는 것을 안다면 극히 적은 경우를 제하고는 그렇게 서툰 반응만으로 일관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란 그리 어리석은 존재가 아닌데 말입니다.

남태평양 웨말레족의 죽음기원신화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되생각하게 합니다. 신은 스스로 지은 인간에게 바나나 나무 와 돌을 보여주면서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사람은 돌을 택하지 않고 바나나 나무를 택했습니다. 신은 말했습니다. “딱하구나! 돌은 죽지 않는데 바나나 나무는 죽는다. 네가 죽음을 선택했으니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 죽음은 그렇게 인간의 삶속에 스미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발언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인간아. 너는 가장 현명한 선택을 했다. 돌은 비록 영원하지만 열매를 맺지는 못한다. 그러나 바나나 나무는 비록 죽지만 열매를 맺는다! 너는 그것을 알 만큼 현명하구나!”

나는 죽는다는 것, 아예 죽음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인간의 존엄인데 우리는 돌의 영속성에 빙의(憑依)되어 아무런 열매도 없는 삶을 ‘평생 죽지 않을 듯’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다시 호스피스 봉사의 현장에 되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스스로 성숙하기 위해서요.*

*** 정진홍은 ...
충남 공주 출신. 서울대 종교학과를 나와 미국 에서 목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03년까지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며 한국 종교학 분야 석학으로 인정받고 있다. 현재 울산대 석좌교수로 있으며 아산나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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