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복룡(건국대 명예교수, 정치학 박사)

1970년대, 엄혹하던 군사 정부의 시절, 대학가는 늘 매캐한 최루 가스로 눈을 뜰 수 없었다. 그때의 공통된 구호는 “군사 정권 물러가라”는 것이었다. 그 무렵의 최대 가치는 '군사 정권 타도'였고, 군사 정권만 물러가면 우리에게 진정 평화와 행복이 올 줄로만 알았다.

1993년 초 드디어 군부 지배가 끝나고 문민정부가 수립됐지만, 정권이 바뀌면 삶의 모습도 바뀌리라던 꿈은 너무 소박했다. 민주화에 조급한 기대감과 군부에 대한 복수심, 훈련되지 않은 자유의지가 탄생시킨 새 지도자는 무능했고 서민의 삶은 전두환 대통령 시대보다 더 팍팍했다. 그러한 삶 가운데에서도 보이지 않게 우리를 지배하는 유산이 있었다. 그것이 곧 상명하복의 종적(縱的) 서열 의식, 적과 동지의 이분법적 인간관계, 지나친 국가지상주의 등 군사 문화의 잔재였다.

해외공관장은 퇴역 군인의 몫이었고, 국영기업체의 이사회는 사단 참모 회의 같았다. 군사 정권 물러가라고 그토록 외치던 바로 그 학생들의 모습에서도 군사 문화의 유산이 보였다. 학군단은 선배들을 향하여 목청껏 '충성'을 외쳐댔다. 보병학교에서도 하지 않는 그런 짓을 보면서 나는 40년 동안 강단에서 그 악습의 폐지를 주장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심지어 화장실과 전철역에서도 악을 쓰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한 제도의 유지를 강조하는 무리들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 군호(軍號)가 학군단의 고과(考課)에 높은 비중을 차지했고, “우리도 했으니 우리도 받아보자”는 보상의식이 작용했다. 소리지르는 학생들의 말을 빌리면 “교문까지 나가는 길이 천리만 같았다”고 한다. 그들은 미워하면서 닮은 것이며, 자신도 모르게 군사 문화에 잘 길들여져 있었다. 신입생 OT에 가면 그런 생각이 더욱 절실하게 든다.

역사적으로 군부 지배에 대한 반감은 늘 있었다. 그러나 군인을 모독한 시대에는 늘 재앙이 따른 것도 사실이다. 고대 로마의 누마왕(Numa)이 달력을 정리하다가 1월을 군신 마르스(Mars)를 기념하는 March로 부르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 March 앞에 새롭게 1월(January)와 2월(February)를 넣은 게 대표적이다. 이로써 자연스럽게 March가 3월이 되고 10월(December)이 12월로 밀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왕위에서 물러난 뒤 로마는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된다. 군인을 모독한 실정(失政)이 폭발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역사에서도 무신에 대한 홀대는 정중부(鄭仲夫)의 난으로 이어졌다.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군인은 존경 받아야 한다. 다만 그 문화가 사회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군인의 사명은 국가의 운명을 좌우했다. 공병은 본디 군인의 몫이었고, 그것이 중세가 지나서야 민간인(civil)에게 넘어옴으로써 지금도 토목공사를 공병(military engineering)에 대한 대칭 개념으로 civil engineering이라고 부른다. 근대국가의 형성과 함께 국민개병제가 실시됨에 따라 젊은이들은 일생의 중요한 시기를 군대에서 보낸다. 그러나 그것은 '썩다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젊은이들은 의무복무 기간에 올바른 참모와 공병 기능, 국가관이라고 하는 값진 교훈을 배우고 제대한다.

나는 신병훈련소에 들어가던 날, 박사학위 과정을 마치고 들어온 나의 인적 사항을 읽어보며 소대장이 나에게 한 말을 잊을 수가 없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탈영을 하지는 않겠구나.” 처음엔 그것이 무슨 뜻인 줄 몰랐다. 훈련소를 떠나며 나는 그에게 그때 그 말이 무슨 뜻인가를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가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ABC를 아는 놈은 철조망을 넘지 않아.” 군사 문화는 병영의 담장을 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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