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은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다고들 한다. 나날이 행복한 사람이 되려면 마음부터 열어야 한다고 말들 한다. 우리 시대 종교학 석학이 보내는 '소소해서 종종 잊곤 하지만 너무나도 소중한' 메세지 <정진홍의 살며 생각하며>에서 마음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만나보자.

언젠들 그렇지 않았겠습니까만 답답하고 속상하고 화가 나는 일이 꽤 많습니다. 요즘 세상사리가요.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알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숫한 못되고 고약한 일이 무척 잦게 일어납니다.

그런데 다행한 것은 이러한 못마땅한 마음을 공감해주는 발언들이 참 많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혼자 속 썩이고 분을 삭이고 있어야 한다면 많이 외로울 텐데 공명하는 메아리가 여기저기에서 울린다고 하는 것은 여간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알 수가 없습니다. 잘못된 일에 대한 비판과 질책, 그리고 당장 어떤 징벌이라도 해야 할 만큼 격한 성토는 그 그릇됨을 한꺼번에 불태우고 쓸어버릴 것 같은 기세로 휘몰아 부는데 그 공감의 메아리가 때로는 갑작스러운 굉음처럼 들리면서 슬그머니 두려워집니다. 이만큼 옳은 발언이 크게 울리는 세상이라면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사회는 마땅히 좋은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쁜 세상이라면 의로운 소리가 이렇게 당당하고 클 까닭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사리가 마땅치 않다고 시무룩하게 사는 제 모습이 분명히 잘못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못된 삶의 모습은 늘어가고만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넘치는 옳은 발언들의 효용은 과연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제 삐뚤어진 마음 탓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쩐지 우리는 내가 부닥친 잘못을 고치려 삶 속에 뛰어들기보다 그 그릇됨을 지적하고 호통을 치는 자리에 서는 것만으로도 자기 책무를 다한다고 생각하는 일에 익숙해 있어 그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드높은 자리에서 심판자의 자세로 가장 근원적인 원칙론만 선포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 그 모습은 고귀하고 권위 있고 지엄하기 그지없지만 그 ‘거리’가 만드는 비현실성 때문에 아무런 ‘효용’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다 문득 외팔이 신 티르가 생각났습니다.

북구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늑대 펜리르는 탐욕의 화신이었습니다. 신들은 펜리르를 그대로 세상에 두면 재앙이 닥치리라는 것을 예견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못 알아들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문제는 펜리르를 어떻게 잡아 묶느냐하는 것입니다. 워낙 분방하고 사납고 고약한 녀석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도 우리는 모두 짐작합니다. 신들은 펜리르를 묶을 밧줄을 마련하여 두어 번 묶어보았지만 그 녀석의 이빨이 번번이 줄을 끊어버려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신들은 난장이들을 시켜 주술밧줄을 만들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밧줄은 마치 비단 줄 같이 보였지만 실은 여섯 가닥의 줄, 곧 고양이 발소리, 여인의 수염, 산(山)의 뿌리, 곰의 감성(感性), 물고기의 숨(呼吸), 새의 침(唾液)을 꼬아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도 우리는 넉넉히 짐작합니다. 욕망을 묶을 끈을 마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죠.

신들이 이 비단 같은 끈을 가지고 펜리르에 다가가자 그 녀석은 이제는 속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녀석은 그 밧줄에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신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속이지 않겠다면 그 끈을 내가 가지는 동안 신들 중의 하나가 내 입에 손을 넣고 있어라.” 아무리 신들이라 할지라도 이 부탁을 선뜻 들어줄 신은 흔치 않습니다. 빤한 일입니다. 우리 다 겪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신들 중의 하나인 티르가 나섰습니다. 그리고 늑대의 입에 자기 손을 넣었습니다. 그렇게 펜리르가 입을 벌리는 순간 신들은 몰려가 그 녀석을 누구도 끊을 수 없는 주술밧줄로 꽁꽁 묶었습니다. 하지만 늑대는 무자비하게 티르의 팔을 물어 끊었습니다.

탐욕은 마침내 포박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외팔이 신의 탄생과 때를 같이 합니다. 그렇다면 옳은 발언, 질책의 발언은 심판자의 의식을 지니고 해야 할 것이 아니라 외팔이 신의 자의식을 가지고 해야 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빈 소리의 굉음’이 ‘욕망의 악다구니’와 섞여 옳은 의도조차 결국 펜리르의 한 모습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런데 티르의 운명은 어찌 되었느냐고요? 티르는 세계의 종말이 왔을 때, 지옥의 늑대 가름과 한 손만으로 싸우다 둘이 다 죽었습니다. 욕망을 책임지고 스스로 새로운 신의 탄생을 위해 사라진 것이라고 어쭙잖은 주석을 달아도 괜찮을는지요.

*** 정진홍은 ...
충남 공주 출신. 서울대 종교학과를 나와 미국 에서 목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03년까지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며 한국 종교학 분야 석학으로 인정받고 있다. 현재 울산대 석좌교수로 있으며 아산나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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