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샤를마뉴인가

고대나 중세 유럽의 위대한 정치가들 중에서도 솔론, 아우구스투스, 엘리자베스 1세 등은 널리 알려진 인물이기에 여기서는 뛰어넘기로 하자. 그 대신 샤를마뉴(Charlemagne) 대제만은 다루어 보고 싶다. 그는 742년~814년간 생존했는데 영어식 이름은 찰스 대제(Charles The Great) 며 라틴어로는 카롤루스 대제로 불렸다. 그는 중세 유럽을 통일했고 유럽인으로 하여금 “하나의 유럽”이라는 통일의식을 갖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는 무력으로 유럽 대륙을 통일하고 지배체제도 정비함으로써 효율적인 통치의 틀을 마련했고 국가의 부를 증진시켜서 민생도 안정시켰다. “하나의 유럽”이라는 의식을 문화적으로 확고하게 이룩함으로써 그는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창출했다. 그가 죽은 뒤 유럽 왕국의 여러 국왕들은 자신들이 그의 적정 후계자라고 자칭했을 정도로 그는 모두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기원 5세기경 서로마가 멸망한 뒤 유럽은 수많은 공국으로 분열되었다. 이 시대에 샤를마뉴는 프랑크 카롤링거 왕조(Carolingian dynasty)의 국왕 피핀(Pepin) 3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젊었을 때부터 “담대하고 출중한 지도자”로 널리 알려졌고 큰 전쟁에서도 10번 넘게 승리했다. 그는 영국과 이베리아반도 그리고 이탈리아 남부를 뺀 나머지 지역의 서유럽을 통치했고 뒷날 이탈리아를 정복함으로써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최대의 영토를 장악한 기세등등한 군주로 군림했다. 당시 로마교황 레오 3세는 800년에 그에게 로마 황제의 칭호를 부여하면서 “고귀한 샤를, 신의 은총으로 황제의 관을 내린다. 위대하고도 평화로운 로마 황제 만세!"라고 선언했다.

2. 통일 유럽의 꿈

그는 수없이 나눠졌던 서유럽을 통일시켜 하나의 통일된 세계로 재편성했다. 그의 업적이 큰 기림을 받게 된 것은 단순히 영토를 넓힌 군주라는 의미보다는 하나 된 유럽 문화를 이루어 낸 지도자라는 이유 때문이다. 위대한 지도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력으로 적을 물리쳐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경제를 일으켜 서민을 배불리게 먹게 하며, 문화로 품격 높은 세상을 이룩하는 것’임을 그가 실증적으로 보여줬다.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루면서도 ‘오직 전쟁을 막기 위한 최후의 전쟁’에서만 활을 당겼고, ‘칼과 창을 녹여 보습과 쟁기를 만드는 것’이 최대의 목표라고 공언했다. 후세의 사가들도 그의 최대의 공적은 고전문화의 부흥이라면서 이를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불렀다.

794년에 샤를마뉴는 독일 남서부 아헨에다 궁정과 왕실 교회를 짓고 그곳을 유럽의 수도로 삼아 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올라서게 했다. 화폐개혁도 단행했고 성문법도 만들었으며 유명한 학자들을 대거 초빙해서는 그들의 고견도 들었다 또한 이름난 고전과 대가들의 작품을 소장하는 거대한 왕실 도서관을 건립했다. 특히 종교의 가치와 사람들의 일상적인 윤리를 강조했으며, 수도원 학교와 성당 학교에서 라틴어를 공부하게 함으로써 카롤링거 르네상스의 꽃을 피웠다. 그는 교회를 통해 예술과 종교,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힘을 기울인 끝에 마침내 ‘카롤링거 르네상스’ 시대를 열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황제 즉위식에서 자신이 “샤를마뉴의 진정한 후손”이라고 자처했다. 지금도 브뤼셀의 신축된 EU 본부 빌딩을 샤를마뉴의 이름으로 부르는데 이는 그가 ‘유럽 통합의 진정한 기수’임을 의미한다. 결국 정치의 궁극적인 귀결은 문화다. 아무리 경제가 발전해도 천박한 문화를 만들어 놓은 지도자는 무능한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에 경제를 위해 문화의 역할을 강조하는 지도자는 더욱 무능한 인물일 뿐이다.

*** 진덕규 교수는 ...
이화여대 명예교수. 역사정치학자. 현재는 (재)한국연구원 이사장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정치의 역사적 기원>, <한국현대정치사서설>, <한국정치와 환상의 늪>, <권력과 지식인>, <민주주의의 황혼> 등이 있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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