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이화여대 총학생회 회의실. 분위기는 자못 심각했다.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 10여 명의 대학생들이 난상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이화여대생들이 아니다. 고려대, 성균관대, 성신여대, 한국외대, +중앙대.... 심지어 서울지역 전문대학 총학생회 협의회에서 온 대표자도 있었다. 「국민승리 21」도 토론자로 참가했다. 「청년실업을 고민하는 대학생 모임」이라는 이름으로 몇 달째, 1주 혹은 2주 단위로 모이고 있는이들의 공통 관심사는 '대학 졸업자들의 실업문제'.

@ '청년실업운동본부' 구성 추진

"대졸 인턴사원제를 악용하는 곳이 한두 기업이 아니라는 데 피해를 본 인턴사원을 대변해 줄 곳은 어디인가?" "남자 만29세, 여자 만25세라는 +취업연령제한 규정을 어떻게 철폐할 것인가?" "대졸 미취업자에게만 +사회적 관심이 집중돼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있는 전문대 졸업생들의 실업문제는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회의의 결론은 서울 지역 5-6개 대학 총학생회장이 오는 29일 전국 경제인연합회를 항의 방문하자는 것. 그들은 여기서 △채용 내정자를 인턴 사원으로 전환시키는 정부정책을 규탄하고 △인턴사원제가 대졸 미취업자에게는 미봉책도 안된다는 점을 폭로하며 △인턴사원들에 대한 다양한 노동착취를 비판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이 모임의 한 관계자는 "민주노총, 한국노총 모두 신규실업 문제에는 무관심한 것을 잘 알고 있다"며 장기적으로는 대졸, 전문대졸 미취업자를 대변할 수 있는「청년실업운동본부」(가칭)를 구성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시기는 99년 상반기로 잡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움직임도 이것만이 아니다. 지난 17일 서강대 총학생회장 최승현군(전산4)은 일반 시민을 포함한 1만1천8백28명의 서명을 받아 '고용안정과 실업문제 해결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박준규 국회의장 앞으로 제출했다. 이들은 여기서 △노동시가 단축으로 신규고용을 창출할 것 △정리해고제 및 파견근로제 철폐, 고용조정법안의 독소조항 시행을 유보할 것 △취업연령 상한제한의 철폐 등을 내용으로 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것을 요구했다.

최승현 총학생회장은 "진정서 제출외에 IMF구제금융이후 기업구조조정을 이유로 채용을 연기시키고 있는 기업들에 대해 법적인 대응을 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현대전자를 상대로 '근로자 확인 소송'을 제기한 「현대전자입사추진위원회」와 같은 움직임이 있으면 언제든지 돕겠다는 것.

그는 또 "내년 3, 4월경이면 '청년실업' 문제에 대해 학생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며 "11월 중에 있을 총학생회장 선거에 +이문제가 중요한 이슈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 운동권 '실업문제' 이슈로

학생운동권의 인식은 간단하다.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대학생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가장 적당한 문제가 '청년실업'문제라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내년 초에는 정부가 내놓은 '고학력 실업대책'의 허상이 낱낱이 표출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이들은 고용조정으로 일터에서 내몰린 기존 노동자와 연대하는 방안을 방학중에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는 것이다.

'취업전선'의 대학생들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접해온 각 대학 취업정보실은 대학생 일반의 위기의식을 비슷한 수준으로 인식하고 있다. 취업상담자체를 하지 않는 데서 이것을 느낀다고 한다.

이런 일은 모든 대학, 서울 지방을 구분하지 않고 똑같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연세대 이봉호 취업주임은 "일단 국내 기업들의 회사설명회가 없기 때문에 학생들이 취업정보실을 드나들 일이 없다"며 "최근에야 2-3개 기업에서 입사지원서를 보내와 이것을 학생들에게 배부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방대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 취업준비생인 박상진군(영남대 응용통계4)은 "아침 일찍 도서관에 나와 토익, 토플 등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가장 무모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학우들도 있다"며 대학생들의 현실인식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그나마 있는 '인턴사원제'도 대학생들에게 불리한 형태로 변질되어가는 것도 대학생들이 분노하는 부분이다.

대표적인 예가 최근 인턴사원 채용 공고를 낸 S사. 24일까지 80명의 신규사원을 모집한 이 회사는 전원 '인턴사원' 형태로 채용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은 7개월의 인턴기간 후 근무성적에 따라 +정규사원으로 채용되는 것이 아니라 또 1년 계약직 사원으로 뽑을 +것이라는 일방적인 회사방침 때문. 99년 1월부터 근무하는 80명이 +정규사원이 될 수 있는 해는 2000년 하반기. 그것도 80명 전원이 입사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며 적자생존 속에서 살아남는 사람만이 가능할 정도로 불리한 조건이다.

서강대 취업정보실 임휘성씨는 "학생들에게 인턴사원으로 입사라는 권유를할 여지조차 주지 않는, 정부정책을 악용한 대표적 사례"라고 잘라 말한다.

@ 학생들 정부정책 신뢰 안해

정부 정책에 대한 냉담한 대학생들의 분위기는 최근 노동부와 한국노동 교육원이 주최한 '취업 창업 설명회'에서 여실히 나타났다.

지난 12일 정부의 고학력 실업대책을 홍보하기 위해 서울대를 시작으로 전국 45개 대학에서 계획됐던 이 행사는 3일간 진행된 후 잠정적으로 개최가 중지됐다. 가장 큰 이유는 졸업을 앞둔 대학 4학년들의 참여가 예상외로 저조했기 때문. 서울대, 한양대 등은 30명 내외의 학생만이 참석한 가운데 행사를 진행했을 정도이다.

정부에 대한 신뢰가 바닥까지 떨어진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고학력 실업대책에 대한 문제제기는 총학생회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간호대학 학생들도 '간호실업'의 심각성을 호소하며 정부에 대책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IMF구제금융이전에는 취업에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던 이들은 최근 각 병원들이 경영 압박을 받으면서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밝히고 잇다. 99년 졸업예정인 7천명의 간호대생들이 1명도 취업을못하는 상황이 예견될 정도.

@ 간호대생들 각개격파 나서

이들은 지난 9월, 서울대, 인하대, 카톨릭대, 중앙대, 이화여대, 연세대등서울 경인 지역 11개 간호대학 학생회를 주축으로 「경인지역 간호학생 +실업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또 오는 11월7일에는 노동부, 보건복지부 등이 참여하는 '실업대책 공정회'를 열 예정이다.

실업대책 위원장을 맡고 있는 오희선양(서울대 간호학과4)은 "공공의료혜택 확충으로 남아도는 의료인력을 고요할 것을 정부에 요구할 +것"이라며 "공청회 이후에는 「위원회」를 전국 단위로 확대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간호사 해외파견 정책은 유럽 여러나라의 높은 실업률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근시안적인 정책"이라며 +"간호대학생들 중 이 정책에 기대를 갖고 잇는 학생은 거의 없다"고 덧붙였다.

노동부 고용정책실에 따르면 99년2월 대학졸업자는 전문대 졸업인원을 포함해 모두 40만명이다. 여기에 군입대, 대학원 입학 등의 인원을 뺀 미취업자는 22만여 명. 98년 2월에 졸업하고 취업 못한 8-9만명을 합하면 미취업자는 30만명을 넘어선다.

하지만 노동부가 대졸 미취업자로 공공근로나 정보화 기반사업 등에 +투입할 수 있는 인원은 4만여 명이 고작이다. 이 인원도 '안정적'인 +직장과는 거리가 먼 '불안정'하며 '일시적'인 체류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생들은 「청년실업운동본부」를 건설하자는 부류에서부터 '인턴사원제' 악용금지를 주장하는 사람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정부 주장인 "경제위기를 각 기업의 구조조정을 통해 극복할 수 있으며, 경제가 회복되면 지금의 실업문제는 해결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데는 공통적이다.

취업을 앞둔 대학생들은 인턴사원이라도 마음 놓고 근무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기업의 '악용범위'를 최소한으로 줄여달라는 것이다.

국민대 졸업준비위원장 송광희군(무역4)은 "정부는 인턴사원 8천명을 모집하는 정책부터 완결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부 고용정책실에 따르면 현재는 약 1천8백명 정도의 인원만 인턴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나머지 6천여 명은 감감무소식인 상태다.

내년 2월은 많은 기업이 인턴사원을 정규직으로 발탁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시기이다. 일단 그 때까지 인턴제는 대졸 신규실업대책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 경제회복 일자리 창출 시급

취업을 앞둔 대학생이 가장 주시하는 단어는 '구조조정 마무리'라는 말이다. 이 말이 주는 희망이 큰 탓이다. 하지만 이제 이들은 막연한기대감을 버리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지난 17일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실업반대 국민대행진'에서 상당수의 대학생들이 참석했다. 대학생들은 삼성플라자를 거쳐 정부종합청사까지 실업자들과 거리행진을 벌였다. 또 오는 29일 전국경제인연합회 앞에서는 '청년실업문제해결을 촉구하는 집회와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이다.

정부가 단기적이고 정치적인 실업대책만 남발한다는 목소리가 지금은 소수이지만 노동부, 정통부, 교육부 등 정부 각 부처의 1차 고학력 실업대책이 마무리되는 내년 2월과 3월의 캠퍼스는 '정부와 기업 비판'의 +목소리로 가득 채워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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