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열풍, 인적성 검사 ‘한국사’ 등장
학력 어학 자격증 등 기존 스펙 항목 줄여

▲ 대통령직속 청년위원회는 지난 4일 ‘2014 스펙초월 채용문화 확산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으며, 기업들의 스펙초월 유도하고 있다. 근로복지공단, 대한주택보증, 대한항공, 롯데, 아시아나항공, 우리은행, 한국가스공사, 한국마사회, 한화, 효성, CJ, KT 등이 참여했다. (사진=이진호 기자)

[한국대학신문 이진호 기자] 취업 준비생 박민석(서울시립대 전기전자 4) 씨는 이번 겨울 방학을 앞두고 한국사 공부를 시작했다. 기업 인적성 검사에 한국사 항목이 늘었기 때문이다. 1~2문제 차이로 합격 여부가 갈리는 탓에 박 씨는 한국사 문항을 포기할 수 없게 됐다. 박 씨 “내년 1월 24일 자격증 시험이 있다. 이번에 합격해야 상반기 공채에 활용이 가능하다”고 했다. 취업 전문 커뮤니티에는 ‘한국사 스터디 모임’을 모집 글이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 한국사 등 인문학 지식 평가 붐 = 인문학 열풍이 올 한해 취업 시장에도 뜨거운 감자였다. 삼성 현대차 LG SK GS 포스코 CJ 신세계 롯데 KB국민은행 신한은행 등이 인적성검사에 인문학 역사 문제를 출제했다.

삼성그룹은 올해 상반기부터 인적성 검사 ‘SSAT’에 역사문제를 포함시켰다. ‘미륵사지 석탑을 축조했고 남송과 일본 아즈카문화에 영향을 준 시대는?’ 등 특정 시대와 관련된 유물이나 인물을 조합하는 방식이다. 삼성그룹은 한국사에 세계사를 결합해 다양한 역사적 분야 지식을 평가했다.

LG그룹도 하반기부터 한자와 한국사 10문항씩을 인적성 검사에 추가했다. LG그룹은 ‘임진왜란이 조선사회에 미친 영향이 무엇인가’와 같이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문항으로 구직자를 테스트 했다. LG 채용 관계자는 “인문학 문제 도입은 신입사원 채용 시 ‘인성이 중요하다’는 이유에서다. 올해 반짝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출제될 것이다”고 밝혔다.

상반기 처음 한국사 문항을 도입한 SK그룹은 객관식 문항으로 인문학을 평가했다. 10개 문항에 5분을 제한 시간으로 뒀다. ‘문화유산과 소재 지역이 올바르게 짝지어져 있는 것’ ‘보기 중 세 번째로 발생한 사건을 고르시오’ 등 빠른 시간에 역사 문제를 풀도록 했다.

에세이 작성도 하나의 방식이 됐다. 현대자동차 그룹은 상반기 인적성 검사에 ‘석굴암, 불국사, 가야고분, 남한산성, 고인돌 등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우리 유산 두 개를 골라 그 이유를 쓰시오’라는 문항을 출제했다. 에세이 작성을 통해 구직자의 역사관과 통찰력을 살펴보겠다는 것이 기업 측의 의도다.

KB국민은행은 자기소개서 항목에 ‘기업들이 인문학적 소양을 강조하는 이유’에 대해 쓰도록 했고, 신한은행은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을 소개하고 그 책을 선택한 이유와 느낀 점을 기술하라’는 문항을 제시했다.

인문학 시험 도입은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엔지니어’ 채용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철행 고용노사팀장은 “융복합 시대가 되면서 필요성이 강조됐다”며 “기업들이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인문학적 감각을 중시하는 것도 한몫했다”고 말했다.

■ ‘탈스펙시대’ 자격증, 어학 비중 줄어 = 스펙초월 채용은 올해 채용 시장의 화두였다. 공기업을 중심으로 ‘스펙 초월’ 채용제도가 적극 도입됐고, 대기업들도 잇따라 스펙을 벗어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스펙 초월 채용은 학점, 어학성적 등 계량된 항목과 점수를 배제하자는 원칙에서 출발했다. 기업들은 지원자의 스펙 보다 직무 적합성을 높이 평가해 맞춤형 인재육성을 원하고 있다. 기존 스펙 대신 지원자의 능력과 스토리를 중심으로 채용을 진행해야 한다는 취지다.

취업포털 사람인 임민욱 팀장은 “기업들이 스펙보다 인재상 부합여부와 인성을 더 중요하게 평가하기 시작했다”며 “구직자들은 기업 인재상을 기반으로 적응력과 열정을 어필해야 경쟁력이 될 것이다”고 덧붙였다.

한국마사회는 스펙초월 채용 대표 기업으로 꼽힌다. 스펙초월 채용을 처음 도입한 올해 지원자가 9,494명으로 지난해(4,866명)보다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서류전형에서 학점, 학벌, 어학점수 등을 배제하면서 구직자에게 채용의 기회를 확대해 줬다는 분석이다. 기존 스펙 평가 대신 지원자 간 상호평가, 협업 직원 평가 등을 도입했고, 블라인드 면접을 통해역량 중심 평가를 진행했다.

한국마시회 임성한 경영관리본부장은 “학점, 어학점수 등은 부족하지만 도전의식, 윤리의식, 문제해결 능력 등 회사가 원하는 역량을 평가할 수 있는 과제를 부여했다”고 밝혔다.

한국전력은 직무 경험이나 비전 등을 제시하는 에세이를, 한국자산관리공사는 서류전형에서 논술 방식을 도입했다. 기술보증기금, 정책금융공사, 주택금융공사 등도 입사지원서에서 학력과 어학성적, 자격증 등의 항목을 없앴으며, 한국가스공사, 한국남동발전, KOTRA,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등 일부 공기업은 무서류 전형을 도입해 지원자 모두가 적성검사에 응시 가능하도록 했다.

■ 대기업 동참, 서류전형 문턱 낮춰 = 스펙초월 채용에 대기업이 빠질 수 없다. 효성은 서류전형 시 학점과 영어 제한을 폐지했다. 효성 류경희 인사담당 상무는 “학점이 나쁘거나 영어점수가 전혀 없는 지원자들도 자유롭게 지원할 수 있다. 다양한 평가 요소를 도입한 결과 자신만의 장점과 독특한 역량을 보유한 지원자들이 합격하는 사례가 많아졌다”고 밝혔다. 효성 측은 해외연수, 자격증, 병역 등 불필요한 스펙 항목을 점차 삭제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아시아나항공은 이력서 사진항목을 삭제했다. 지난 10월 국제선 객실 승무원 모집부터 온라인 지원 시 증명사진을 첨부하지 않도록 기준을 변경했다. 아시아나항공 측은 “지원자들의 경쟁이 과열되고, 사진촬영에 과도하게 비용을 투자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고 전했다.

롯데는 탈락 구직자들을 배려하는 제도를 신설했다. 하반기 신입 공채부터 불합격자 피드백을 도입했다. 국내기업 최초다. 롯데 기원규 인사팀장은 “이메일을 통해 면접전형별로 응시결과를 전달한다. 불합격한 취업 준비생들에게 보완점을 전달해 그들이 효율적으로 취업을 준비할 수 있도록 위함이다”고 설명했다

KT는 달인채용과 스타오디션, 지역인재 채용 등을 추진하고 있다. CJ그룹은 기업과 특성화전문대 인재매칭 사업을 통해 스펙 초월 채용을 실시하고 있다.

■ ‘평가도구 마련이 과제 = 탈 스펙으로 인한 우려점도 있다. 뚜렷한 평가 방식이 없으면 오히려 구직자 입장에서 추가적인 부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취업포털 사람인이 지난 10월 구직자 63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64.2%가 ‘스펙초월 채용이 본인의 취업에 불리할 것’이라고 답했다. 그 이유로는 ‘기본 스펙 외 준비할 게 더 늘어난 것 같아서’(49.9%, 복수응답)를 꼽았다.

지난 4일 대통령직속 청년위원회 협약식에 참석한 한 기업 인사담당 임원은 “이전보다 많은 지원자들로 자기소개서를 읽고 평가해야 하는 기업 인사실무자들의 부담감도 커졌다”며 “지원자들의 직무능력을 평가하기 위한 명확한 기준과 효과적인 평가도구 마련이 과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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