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래없는 차별화된 학제편성·영어교육·토론식 수업

▲ 미국 선교사 H.G.아펜젤러(1858∼1902)가 세운 한국 최초의 서양식 학교건물이다. 배재학당 동관 건물은 1916년에 세워졌고 현재도 처음 지었을 때의 원형이 대체로 남아 있다. 1984년 배재고가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교실로 사용됐다. 2008년 7월 동관 건물을 새롭게 단장해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개장했다. 서울특별시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됐다.(사진=배재대)

토론모임인 협성회, 충군애국·주권수호·민중계몽 주장
열린토론에 대안마련까지… ‘불통’ 현대사회와도 비견
협성회 회보 호응에 기관지로, 첫 일간지 매일신문 발간 
음악·미술 수업, 제복과 제모, 수학여행까지 새 학풍 조성

[한국대학신문 정윤희 기자] 교육은 개인의 세계관을 바꿔 놓을 수 있는 힘이 있다. 개인의 입신양명을 목표로 삼았던 청년들이 토론을 통해 위태로운 조국의 자주국권을 주장하고 민중을 계몽하는 데 앞장섰다. 정치·사회·경제 분야 전반에 걸쳐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한국 근대교육의 효시라 평가받는 ‘배재학당’ 학생들은 바로 이렇게 사회적 참여에 적극적이었다. 1885년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은 조선시대 교육기관의 형태와 목표까지도 확연히 달랐다.

우선 신분적 제약을 넘어서는 교육방식을 채택해 누구나 공부할 수 있었고, 정해진 수업시간과 수업계획, 명문화된 학칙에 따라 운영됐다. 교육 목표도 생소했다. 아펜젤러는 ‘자유인과 교양인 양성’을 목표로 학생들에게 자유주의 교육을 실천하고 스스로 남에게 봉사하는 섬김의 정신을 함양토록 했다. 배재학당 학당훈은 마태복음 20장 26~28절 내용을 담은 “욕위대자당위인역(欲爲大子 當爲人役)-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였다.

배재학당의 교육 경영은 서구식 모델을 적용한 것으로 이후 설립된 근대식 교육기관들은 배재학당의 학교 운영 방침을 모델로 각 기관에 맞는 규칙을 제정해 나갔다.

▲ 1885년 8월 3일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최초의 근대식 사학기관이다.(사진=배재대)

■ 영어교육에 ‘대학부’ 설치까지… 한글, 한문 기초과목도 함께 편성 = 배재학당은 영어교육의 비중이 높았다. 의료와 교육을 전면으로 내세운 선교사들의 전략에서 비롯됐다. 또 조선 정부의 행정적 필요에 의한 때문이기도 했다.

1886년 이미 정부는 육영공원을 설립해 영어가 가능한 고위관료를 육성하고자 했다. 하지만 외국인 영어 교사가 퇴직하고 고위관료들이 영어 습득에 열성을 보이지 않아 결국 1894년 육영공원은 폐교됐다. 같은 시기 배재학당에 입교하는 학생들이 많아졌는데 이는 영어 교육 수요자들을 배재학당에서 흡수한 것으로 보여진다.

당시 영어교육 기관에 학생들이 몰린 이유는 입신양명 때문이었다. 아펜젤러가 남긴 배재학당 첫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조선인에게 왜 영어를 공부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영어를 조금만 알아도 더 나은 관직에 나아갈 수 있다”고 답변했다’고 전했다. 

배재학당에서 영어교육만 진행한 것은 아니었다. 배재학당은 ‘일반과학’과 ‘지식의계몽’이란 과목에 산수·언문·한문 등 기초과목을 함께 개설해 가르쳤다. 한글 교육을 정식 교과목으로 편성한 것은 배재학당을 졸업한 학생들이 각처에서 민중을 교육하고 계몽하는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으로 해석된다.

학제는 중학교부터 대학의 특성을 아우르는 종합적 성격이 강했다. 오늘날 중학교 수준에 상응하는 ‘보통과’와 영어과·한문과·지지과(地誌科) 등 세 개 과로 나눠진 ‘본과’ 그리고 본과를 마친 학생들이 3~5년 코스로 이수 가능하고, 문과·신과·상과·수물과·응용화학과·농과의 여섯학과로 구성된 ‘대학부’가 존재했다.

▲ 협성회회보 제1권 1호 표지, 1898년(사진=배재학당역사박물관).

■ 최초 학생조직 ‘협성회’ 토론 펼쳐… ‘매일신문’ 첫 일간지 발행 = 배재학당 학생활동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협성회’란 조직이었다.

협성회는 독립협회로 잘 알려진 서재필의 지도 아래 장차 조선에 뿌리내릴 의회제도를 이끌어 나갈 청년층을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매주 토요일 서양식 토론회를 열었으며, 배재학당 학생뿐만 아니라 누구나 자유롭게 와서 구경 할 수 있고, 정회원은 아니더라도 찬성회원으로 입회 가능했다.

서재필은 자기의 강의만 듣고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학생들 스스로가 일반 지식, 국내·외의 문제를 놓고 서로 토론하게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학생 대부분은 여러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의사를 주장해 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거의 호응이 없었다. 하지만 학생 13명으로 시작한지 불과 1여년 만에 200여 명의 회원을 보유하게 됐다.

1896년 11월 협성회가 정식 조직되고 첫 모임을 가졌다. ‘협성회회보’ 창간호에는 △충군애국과 용맹을 기르고 △회원 간 친목을 도모하며 △학문에 힘쓰고 유익한 일을 권하고 허물은 경책하고 △전국 동포를 권하여 계몽하고 △나라와 집안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했다는 협성회 조직 목적이 잘 나타나 있다.

노희창의 ‘배재학당 계몽운동과 협성회’ 연구논문에 따르면, 1898년 7월까지 확인할 수 있는 토론 주제로는 사회분야가 30개로 59%를 차지해 가장 많고 △정치 15(29%) △경제 6(12%) 등을 포함해 모두 51개다. 주로 ‘국한문 병용’, ‘학생 복장의 착용’, ‘체육 및 여성 교육’, ‘장애인 교육’, ‘남녀 교제의 자유’ 등 사회 분야 가운데 교육과 의식개혁 등과 관련한 내용이 많았다.

신주백 연세대 HK연구교수는 “형식과 내용을 풍부하게 하면서 쟁점도 명확하게 하기 위해 대립성 주제로 설정한 것이 눈에 띈다”며 “현안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공유하고 합리적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려 노력했다란 점에서 ‘불통’이 화두인 오늘날에도 비견되는 역사적 경험”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강명숙 배재대 교수도 “협성회 토론회는 이후 독립협회를 비롯해 각종 사회단체에 영향을 미쳤고, 독립의식을 고양시키는 데 공헌했다”고 강조했다.

주간지 ‘협성회회보’가 점차 내외적으로 많은 관심과 호응을 얻게 되자 협성회 내부에서 일간화가 논의됐고, 실제로 조선의 첫 일간지 ‘매일신문’이 12개월 간 간행됐다.

‘매일신문’에 실린 논설 주제는 사회분야보다 ‘서재필 추방 논의에 대한 반박 논설’, ‘러시아와 일본이 조선을 제외하고 조선 문제를 협약한 것에 대한 비판’, ‘만민공동회 탄압에 대한 보도’ 등 정치분야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협성회가 시간이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의 개혁을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토론회와 기관지 발행을 통해 △충군애국 △자주국권 수호 △민중계몽을 주장 해 온 협성회는 이를 위해 아낌없이 ‘행동한’ 조선 최초의 학생 단체이자 사회·정치단체였다.

▲ 1915년 3월 조선총독부가 '사립학교규칙개정'을 공포하면서 배재학당은 4년제의 배재고등보통학교로 등록됐다. 사진은 배재고등보통학교 1932년 졸업앨범 속 수학여행 사진, 중국 랴오닝성(遙寧省) 잉커우항(營口港)에서 찍었다(사진=배재학당역사박물관).

■ 제복과 제모, 수학여행 등 새 학풍을 열다 = 배재학당이 근대교육의 시초라 불리는 이유는 새 학풍 조성에도 기여했기 때문이다.

학당 초기 학생들은 일정한 제복이 없어 평소에 입던 도포(道袍)에 큰 갓을 쓰고 행전(行纏)을 차고 다녔다. 하지만 1897년부터 제복과 제모를 만들어 전교생이 제복을 입고 다녔다. 이 모습은 당시 개화청년들의 상징이자 서울 장안의 명물이 됐다.

제모는 검은 색깔의 둥근 모양을 한 것으로 상투를 뒤로 제쳐 놓고 그 위에다 모자를 쓰며 모자 윗부분에는 청홍의 선을 둘렀다. 제복도 검은 색의 양복 옷소매 끝 부분과 앞자락 단, 바지의 좌우 겉 솔기에 청홍의 복선을 달았다. 이 두 색깔은 태극기의 색깔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수학여행도 배재학당에서 처음 시작됐다. 1896년 4월 18일자 ‘독립신문’에는 배재학당 학생들이 때때로 야외에 나가 자연을 즐기면서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는 기회를 가졌음을 확인해 준다. 맑은 물에 구태를 씻고 만물의 새로운 기운을 받아 온갖 학문을 널리 배워 새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학생들에 대한 당시의 사회적 시각도 반영돼 있다. 1901년 3월에는 교사 인솔 하에 개통 된지 얼마 안된 경인선을 타고 제물포까지 갔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서양음악과 미술도 배재학당 수업을 통해 국내로 유입됐다. 배재학당 구술채록에 따르면, 서양의 ‘음표’에 대해 알지 못하는 학생들은 무척이나 신기하고 재미있어 했고, 모두들 음악시간을 좋아해 늦게 들어가면 앉을 자리도 없었다고 한다.

미술시간에는 주로 연필로 소묘를 했으며, 미술 책이 마련되지 않아 시간마다 그때그때 좋은 그림을 칠판에 걸고 그리게 했다. 학생들은 선교사 노블 부인에게서 음악과 미술을 배웠고 여자에게 공부를 배우는 것이 신기하고 한편으론 아니꼬운 듯도 여겨졌으나 사실 제일 흥미로워하던 시간이었다고 전해졌다.

<참고문헌>

신주백·강명숙, 『대한민국과 배재학당』,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연구집7. 2014.
배재학당사 편찬위원회, 『(신교육의 발상지, 신문화의 요람) 배재학당사=大學史』, 배재학당, 2013.
노희창, 『배재학당의 계몽운동과 협성회』, 연세대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2010.
강명숙, 「한국 근대교육의 선구자(5)-아펜젤러와 배재학당」, 『私學』125,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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