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조신화를 포함한 고대 관련 기록에서 흔히 만나는 종교적 의미가 들어있는 기사 내용들 속에는 특이하게도 광명세계에 대한 희망과 이상은 있어도 그에 반대되는 암흑세계나 죽음의 세계에 대한 공포나 불안은 없다. 국조신화 속에 보이는 ’수의천하‘ ’탐구인세‘ ’홍익인간‘ ’광명이세‘ 등의 천하·인세·인간·세 등은 사람 사는 세계의 뜻으로 공통된다. 고대의 우리 선조들의 주된 관심은 항상 현세로 집약되어 있었다. 이러한 내용으로 국조신화를 기록한 사람들의 서술 의도는 복합 민족국가로서의 개국이념을 분명하게 제시 하는데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한 기록을 남기려는 목적, 그것은 그 시대의 정신과 이상의 결론일 수밖에 없다. 단순히 과거를 기억하도록 하기 위한 자료로서 집단적 삶의 이상을 국조신화의 형태로 제시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국조신화의 개국이념이라는 원천으로부터 비롯한 집단의 역사적 꿈과 이상을 실현할 책임이 어렵고 힘든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우리들’ 신성한 조상의 자손들에게 있음을 강조하고 설득하려는 것이 기록을 남긴 이들의 교육정신사적 의도이었을 것이다.

“하늘과 땅의 우주적 결합으로 태어난 위대하고 신성한 조상의 자손인 우리들이 주인으로 살고 있는 이 터전은 신성한 고장이니 우주자연의 조화 질서와 조상의 영령들의 보호와 모든 신불들의 도움에 힘입어 이 고장을 밝고 조화로운 이상세계로 만드는 홍익인간 광명이세의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이상이고 목적이다.”

우리시대의 말로 서술 한다면 국조신화 기록자들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한 삶의 가치와 이상은 아마도 이와 비슷한 선언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것은 그들이 추적 발굴한 조상들의 삶의 흔적과 기록들 속에서 찾아낸 국가 공동체 집단의 이상 이었을 것이고, 전란과 사회적 혼란, 궁핍으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그들 시대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교육정신사적 의미를 지닌 메시지였을 것이다.

무속에서는 사람이나 귀신이나를 불문하고 그리워해야 할 이상향은 오직 현실세계이다. 그런데 그 현실 세계가 질서와 조화를 잃은 것이 굿판을 벌일 수밖에 없는 현재적 삶의 상황이라고 보는 것이다. 인간의 삶의 현실은 그러니까 균형과 질서가 파괴된 이상향인 셈이다. 굿은 그 파괴된 균형과 질서를 원상회복함으로써 현실을 평화공존의 이상향으로 만들기 위해 마련된 신성한 시공간적 상황인 것이다.

이러한 무속적 시․공간 관, 현세중심 세계관은 놀랍게도 고대 국조 신화의 세계관과 일치한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탐구인세’ ‘홍익인간’ ‘재세이화’ 혁거세 신화에 나오는 ‘광명이세’의 개국 이념이 의미하는바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현세중심 세계관의 핵심은 무속의 그것과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무속문화의 현장에서는 살아있는 사람들 사이에 차등을 두지 않는다. 상하 차등이 없을 뿐 아니라 유교적 남녀 차별도 없는 것이 무속문화의 속성이다.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영령들 간에도 단절적 차등이 없는 것이 무속 문화의 특징이다. 한마디로 인간 세계를 불평등하고 부조화적인 현실로 몰아가려는 지배세력들에 대해서 순순히 승복하려들지 않는 것이 무속 문화 속성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는데, 나는 그것을 무속의 조화적 평등주의 사상 또는 평화공존주의 사상이라고 불러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무속은 현실을 지배하는 원칙주의의 권위를 거부하고 정반대되는 상황지향적 현실주의의 방법을 행동양식으로 사용해 왔다. 현실을 위협하는 다양한 종류의 힘들과 만났을 때 무속적 행동양식에서는 가능한 한 정면대결을 피하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가면서 타협과 절충을 시도한다. 무속의 가치관으로는 싸워서 이길 수 없는 힘들과는 경쟁이나 대결 대신에 화해하여 친해지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다.

굿판에서는 사람보다 강한 힘이라는 점에서는 큰 신이건 작은 잡귀이건 죽은 어린아이의 혼령이건 마찬가지이다. 미약한 힘이라 해도 화가 나거나 한이 맺히거나 원망이 생기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해코지 할 수 있기 때문에 죽은 어린 아이의 혼령까지도 잘 위로하고 편안하게 돌려 보내야하는 것이 유교문화와 구별되는 무속문화의 속성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인간, 곧 우리의 삶의 세계를 온전하게 지키려는 것이다. 굿의 뒷전에서는 비참하고 불행하게 살다 죽은 온갖 잡귀 잡신들이 등장하는데 이들과 함께 울고 웃으면서 위로하는 공감의 체험을 하는 절차를 ‘풀이’ ‘놀이’라고 부른다. 나보다 강한 대상들과는 재빨리 친구가 되고 나보다 약하거나 불쌍한 대상들에게는 먼저 베풀어 포용하는 것이 현실세계를 이상세계로 만드는 무속적 삶의 지혜인데 아마도 이러한 지혜로 우리 민족은 그 오랜 세월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 김인회 교수는…
연세대 교육학과를 나와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1969년 이화여대에 부임했고 1980년 연세대로 자리를 옮겨 2003년 정년 퇴임했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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