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익(본지 논설위원/우석대 교수)

독일의 문호 괴테는 1825년 어느 날 자택을 찾은 영국인 손님에게 독일어의 우수성을 다음과 같이 열정적으로 자랑했다. “귀국의 젊은이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독일어를 배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문학이 배울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 때문만 아니라, 이제 독일어를 잘 이해하기만 하면 다른 말을 많이 알지 못해도 되기 때문이지요. 다만 프랑스어만은 배워야겠지요. 프랑스어는 사교 언어이고, 특히 여행 중에는 없어서는 안 되니까요. 누구나 알고 있어서 어디로 가든 통역 대신에 그 말로써 일을 볼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어나 라틴어, 이탈리아어나 스페인어의 경우 이들 나라의 최고 작품은 훌륭한 독일어 번역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에 특별한 목적이 없는 한 그 말들을 배우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들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독일인의 본성 속에는 모든 외국의 것을 그 본래 모습대로 평가하면서 이질적인 특성에 자신을 동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언어는 매우 유연합니다. 그 때문에 독일어 번역은 매우 충실하면서도 완전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좋은 번역이 있으면 시야가 매우 넓어진다는 것입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라틴어를 몰랐기 때문에 프랑스어 번역으로 키케로를 읽었답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원어로 읽는 것 못지않게 훌륭하게 읽었던 거지요.”

해마다 한글날이 오면 우리는 한글의 과학적 우수성을 자랑한다. 그런데 우리의 한글 자랑과 괴테의 독일어 자랑에는 큰 차이가 있다. 우리는 한글의 ‘과학성’을 자랑하는데 괴테는 독일어의 ‘콘텐츠’를 자랑한다. 과학성과 콘텐츠 중 무엇이 더 중요할까. 문자는 무엇보다 지식을 전달하는 그릇이다. 그릇은 좋은데 그 안에 담긴 음식물이 조잡하다면 허망하다. 훌륭한 번역이 얼마든지 있어서 한글만 알아도 전 세계의 고급 지식을 얼마든지 섭렵할 수 있다고 자랑할 날이 우리에게는 언제 올까. 괴테는 이미 200년 전에 독일어가 그 수준에 도달했다고 자랑했다.

일본 교토산업대의 마스카와 도시히데(益川敏英) 교수는 “영어를 못해 물리학을 택했다.”고 농담할 만큼 영어와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다. 대학원 시험 때 지도교수가 그의 외국어 시험을 면제해줄 정도였고 평생 외국도 못 나가 여권도 없었다. 하지만 일본어밖에 할 줄 몰랐던 그는 2008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일본어만으로도 세계 최고 수준의 학문적 성취가 가능했음을 뜻하는 것 아닐까. 일본 사회과학의 텐노(天皇)로 불리는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는 일본이 근대화를 이루는데 번역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단언한다.

우리는 독일, 일본과 사뭇 다르다. 대학의 연구업적평가 항목에서 번역은 거의 비중이 없다. 정부 예산으로 시행하는 유일한 번역사업인 한국연구재단의 ‘명저번역사업’ 지원예산은 2005년 17억 원이던 것이 올해는 10억 원으로 10년 만에 반 토막 났다. 예산을 심의한 기획재정부 관료는 “학자들이 영어로 읽을 수 있는데 굳이 예산을 들여 번역을 할 필요가 있느냐, 이만큼 사업을 했으면 웬만한 고전은 대부분 번역된 것 아니냐”고 말했다고 한다. 모국어로 세계의 모든 지식을 읽을 수 있게 만들겠노라는 비전도 포부도 없는 한심한 발상이다. 대학의 번역에 대한 인색한 평가 점수와 궤를 같이 한다.

만일 세종대왕이 다시 온다면 과학성 자랑이나 하면서 번역을 통한 한글 콘텐츠 확충을 외면하는 우리의 우둔함을 엄히 꾸짖을 것만 같다. 세종이 최고의 문자를 발명했다면, 우리는 그 한글에 최고의 콘텐츠를 채워 후손에게 전달할 책임이 있다. 이것이 ‘역사의식’이다. 이를 못한다면 우리는 두고두고 후손들에게 못난 조상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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