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인(본지 논설위원/춘천교대 교수)

세상이 한껏 소란스럽다. 지난 10월 30일에 열린 역사학대회에서 난생 처음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부으며 학자들에게 달려드는 사람들을 목도했다. 당황하거나 분노하기보다는 서글픔이 앞섰다. 정치가 학문을 능멸하면 학자들도 테러를 피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해방정국의 현실을 다룬 이근영의 ‘탁류 속을 가는 박 교수’란 소설을 다시 뒤적였다. 이 소설에서 박 교수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고 정치성 없는 문학작품을 쓰며 시류에 휩쓸리지 않으려 애쓰는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도 끝내 혼돈스러운 탁류 사회의 풍파에 휩쓸리고 만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대학과 거리는 물론 한가로워야 할 시골구석에서 일어난 테러를 지켜만 보던 박 교수 역시  좌익 정치 활동을 하는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느닷없는 테러에 큰 부상을 입는다. 그 자리에는 단독 정부 수립을 찬성하는 손님들도 있었으나, 누구도 테러를 피하지는 못한다. 병원에 입원한 박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탁류라는 제목으로 단편 하나 구상했어. 탁류만을 그리지 말고 탁류 속에 흐르는 청류를 봐야 헌단 말일세. 그것이 진정한 리얼리즘이야.” 결국 그도 현실 속으로 한 발 내딛는 선택을 한 것이다.   
 
이 소설은 해방정국이 이상을 좇으며 지낸 박 교수마저 현실을 직시하며 살 수 밖에 없음을 수긍하게 만든 긴박한 시대였음을 보여준다. 박 교수의 학자로서의 삶을 온전히 지켜주지 못한 탁류의 시대였던 것이다. 역사학자로서 학문에 정진했던 교수들이 권력의 정략에 의해 모욕적 비방과 욕설과 멱살잡이의 대상으로 전락하면서 거리로 나서게 만든 오늘의 현실과 크게 다를 바 없던 시절이었다.  
    
이 소설에서 딱 한번 나올 뿐이지만 눈에 확 띄는 말이 바로 ‘청류’다. 소설 끝자락에 반전처럼 등장하는 ‘탁류 속에 흐르는 청류’라는 표현은 탁류 사회의 혼돈을 헤쳐 나갈 길을 제시해야 하는 지성인으로서의 대학교수의 책무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대학교수가 탁류 사회 속에서 짊어져야 할 청류로서의 책무란 무엇일까. ‘탁류 속을 가는 박교수’는 1948년 6월에 발표된 작품이다. 8년이 흐른 1956년 8월 23일 자 ‘경향신문’은 대학교수의 책무에 대해 이렇게 준엄하게 쓰고 있다.   
 
‘대학교수는 오직 그 교육자적 중립성과 학자적 양심에서 다만 비판을 할 따름이다. 그것이 무엇이 나쁘단 말인가. 대학교수는 실로 한 나라의 최고 지성인이기 때문에 그들이 정부시책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비판적으로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약에 무비판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예외적인 사례에 속하는 일일 것이다. 비판이 없는 곳에 자유는 없고 자유가 없는 곳에 민주주의는 없다. 이를테면 민주주의는 일종의 비판정치이다. 그래도 명색이 대학교수라는 사람들이 소위 어용학자가 되어 식견도 없이 무기력하게 덮어놓고 집권자의 시책을 합리화시키기에 여념이 없다고 하면 이 나라 민주주의의 장래는 과연 어찌 될 것인가? 우리나라 대학 교수 중에 일신상의 영달을 위하여 곡학아세하는 사람보다도 우국경세(憂國經世)의 포부를 품고 정학대도(正學大道)로 나가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싹수가 있다는 징조가 아니고 무엇인가’ 
 
과거와 살며 역사를 빚는 데 몰두하던 대학교수들이 대학의 문턱을 넘어 거리로 나섰다. 박교수처럼 탁류 사회에서 청류로서의 지성인의 길을 선택했다. 박교수가 거듭 고심하고 방황했듯이, 그들 역시 쉽지 않는 결단을 내렸다. 다시 오롯이 사료 속에 파묻혀 과거와 대화하며 살아가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당분간은 난망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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