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흥 KAIST 기계공학과 해양시스템공학대학원 교수

지난 50년간의 압축성장에서 우리가 택한 방식은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 전략이었지만, 이제는 그 수명이 다하여 퍼스트 무버 전략으로 바꿔야 한다는 얘기가 많다. 그렇다면 패스트 팔로워에서 퍼스트 무버로의 변신은 기업에게만 해당하는 것일까? 기업만 혼자 선진국으로 갈 수는 없을 것이고, 우리 사회 전체가 같이 변해야만 선진국의 문턱을 넘을 수 있을 것이다. 세계적 기업에서 근무하게 될 인력을 양성해야 하는 대학도 마찬가지로 선진화되어야 한다.

자동차 제작에서 녹다운이라는 생산방식이 있다. 자동차를 구성하는 모든 부품들을 키트로 만들어 수입하고, 현지에서는 조립만하여 생산하는 방식이다. 한국에서 1960년대에 처음 만들어진 새나라자동차는 일본 닛산에서 완전한 부품을 수입하여, 한국에서 조립만하여 국산차라고 판매된 자동차였다. 이제 한국의 자동차 산업은 인도네시아의 국민차를 녹다운 방식으로 수출하고 있는 세계적인 자동차 산업 국가가 되었다. 이처럼 한국의 제조산업은 모방 생산과 기술 수입을 통해 출발하여, 조금씩 국산화율을 높여가면서 성장하였고, 이제 더 이상은 따라갈 선두주자가 없어 스스로 정글을 헤쳐나가야 하는 선두에 서게 되었다.

그렇다면 대학은 어떤가 ? 대학도 역시 어려운 여건에서 일본에서 수입한 학문과 해방 이후에 주로 미국에서 수입한 학문을 키워와, 이제는 세계 100대 대학에 몇 개 대학이 포함될 정도로 성장해 왔지만, 산업의 발전에 비해서는 선두에 서는 대학들이 보이지 않는다. 국내 최고 대학이라는 KAIST에도 최근까지 미국에서 총장을 수입(?)하여 미국의 최신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20세기 초반에 산업과 학문의 일류화를 이룬 미국도 그 초기에는, 유럽의 산업혁명에 비해서는 100년 정도 뒤떨어져 있어, 산업과 학문에서 유럽을 카피하였다고 한다. 40년 동안(1869년–1909년) 하버드 대학의 총장을 역임하면서, 하버드를 미국 최고의 대학으로 이끈 찰스 엘리엇은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다고 한다. “대학은 영국이나 독일에서 다 자란 채로 식목되는 것은 아니다. 대학은 씨앗부터 새로 자라나야 한다. 미국의 대학은 해외 대학의 복제품이어서는 안되며, 미국의 사회와 정치의 관습에서 천천히 자연스럽게 성장해야 한다. 미국 대학은 동등하게 오리지널해야 한다.”

하지만 퍼스트 무버는 패스트 팔로워에 비해 훨씬 힘든 방법이다. 빙상경기인 쇼트트랙에서 선두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어렵기에, 선두가 계속 바뀌면서 그 뒤를 바짝 쫓는 선두그룹이 형성된다.

실패란, 작은 실패라도 그에 따른 비용이 따른다. 따라서 적은 부담으로 더 많은 시도를 해 보고, 실패의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는 제도의 마련이 필요하다. 다행히 대학에서의 실패는 그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어 보인다. 기업이나 정부의 연구소에서 시행되는 시행착오와 그에 따르는 실패에 대한 부담은, 대학에서 시행되는 시행착오보다는 그 부담이 상대적으로 크다. 실패에 대한 부담이 비용이나 시간적인 측면에서 크기 때문에, 실패에 따르는 책임도 크게 되며, 이에 따라 리스크가 큰 새로운 시도를 하는데 어려움이 존재한다.

미국의 실리콘밸리에서는 실패한 경험이 소중한 자산으로 여겨져서, 새로운 창업을 위해 투자자를 구하는데 도움이 된다는데, 한국에서는 2000년경의 창업 1세대들이 신용불량자로 전락하여 사회로 복귀하는 것이 막히는 바람에, 최근에 다시 지피고 있는 창업붐의 불씨가 살아나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실패에 따르는 개인들의 부담이 크다 보니, 과감히 실패를 선언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기 보다는, 종료를 지연하는 좀비기업들이 많게 된다.

선진대학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학문의 단위를 보다 쉽게 시도해 볼 수 있는 쉬운 창학문(創學問) 제도의 마련이 필요하다. 고등학교에서 이과와 문과의 통합도 논의되고 있지만, 큰 나무에서 뿌리로부터 가지가 뻗어 잎새로 이어지는 모습처럼, 학문의 분화도 위로 올라가면서 다양화 및 세분화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학사를 수여하는 학사 조직(undergraduate program)은 좀 더 큰 단위로 추진하더라도, 대학원 조직 (graduate program)은 보다 쉽게 창학(創學)하고 취소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실패에 대한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은 대학에서, 새로운 학문적 시도를 보다 쉽게 시도할 수 있게 제도화 하고, 실패한 학문적 시도를 추진한 멤버들이 좀비기업처럼 연명하기 보다는, 명예롭게 후퇴가 가능한 종료제도의 도입을 통해, 대학도 기업과 함께 퍼스트 무버로 변신이 가능하며, 대학이 한국 사회 혁신의 동력원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한국대학신문>

저작권자 © 한국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