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상 서울대 교수(교육)

한국은 2016년 12월을 아주 바쁘게 보내고 있다. 촛불집회가 토요일마다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피의자 신분이 되었고, 국회에서는 대통령이 포함된 국정농단 사건을 초헌법적 범죄로 간주하여 대통령 탄핵이 이루어졌다. 이와 동시에 관련 사건에 대한 국정조사(청문회)가 진행 중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관심을 끄는 한 대목이 있다. 청문회에 등장한 전·현직 주요 관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그렇다.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을 통해서 자신과 관련된 모든 사안을 부인하거나 모른척 한다는 점이다. 그럴 수 있다. 기억나지 않을 수도, 혹 모를 수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대답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보다 똑똑하다고 했던 사람들이다. 가장 선호하는 대학, 가장 선호하는 학과를 졸업하고 누구나 바라는 직장에서 가장 큰 권위를 누렸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거쳐 온 학력과 평생 경력은 충분히 훌륭하게 보이고 모든 부모가 당신 자녀들에게 바랄 만한 길이었음에 분명하다.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냈던 전직 고위검사 출신은 이 거대한 2016년 대한민국 부패 스캔들의 핵심 관계자들을 ‘존경한다’는 말로 전 국민의 맘을 깊숙이 멍들게 만들었다. 도대체 이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이들의 입을 통해 나오는 대답을 보고 ‘무책임하다’, ‘답답하다’는 한숨 섞인 비판을 넘어 우리는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

나는 이들을 똑똑한 사람들로 규정했고, 그 기준에 따라 이들에게 부여했던 사회정치적 권위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우리는 똑똑하다는 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아이가 태어나 자라면서 우리는 수도 없이 ‘똑똑하다’는 말을 내뱉고, 그 상황과 맥락은 아주 다양하다. 그러나 아이가 학교라는 제도에 편입돼 학생이 되는 순간 그 많고 다양한 ‘똑똑함’은 오로지 ‘학교 성적이 높다’는 것 이상을 의미하지 않게 된다.

학교 성적은 교육과정(課程)상 알아야 할 것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를 확인하고, 학습자로서의 학생 배움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비슷해 보이는 또래 아이들 속에서 특정한 개인의 지적 능력의 위계를 만들어주는 것으로 충실히 기능한다. 이는 상위학교로의 진학에 직접 관여하고, 곧 제한된 사회경제적 지위를 배분받는 주요 평가기준으로 작동한다. 더 이상 ‘똑똑하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그것보다 ‘몇 점’ ‘몇 등’ ‘어느 학교’ ‘어느 대학’이 곧 그 ‘똑똑함’을 충실하게 해석해 줄 수 있는 말들이라고 인식하고, 또 말없이 그러한 현실에 수긍한다.

‘점수경쟁’ ‘등수경쟁’ ‘대학경쟁’ 좋은 위치를 차지함으로써 ‘똑똑함’이라는 능력과 인정을 동시에 차지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점수를 올릴 수만 있다면, 등수 경쟁에서 이길 수만 있다면, 좋은 대학에 진학만 할 수 있다면, 과외든, 고액 학원이든 상관하지 않게 되었고 이를 지원하기 위한 가계부담은 중요한 삶의 투자로 인식되고 있다.

나와 다른 사람이 동시에 잘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공부는 오로지 나 개인의 일인 것이고, 나와 내 가족의 운명을 위한 것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똑똑함’은 나 이외의 다른 것과 상관되지 않는다. 나의 ‘똑똑함’을 대변해 줄 ‘점수’와 ‘등수’ 그리고 나를 표현해 줄 ‘대학’ 배경 이외에는 다른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일까? 어떻게 똑똑하고, 왜 똑똑해야 하고, 어느 측면에서 똑똑해야 하고, 똑똑한 것이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 묻지 않게 되었다. 수위를 교육이란 이름으로 이뤄지는 활동에 충실히 참여하고, 이행하면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도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안타깝지만 그렇지 않다. ‘똑똑함’을 가리키는 용어는 ‘지능(intelligence)’이라고 말하지만, 이 지능은 하나의 능력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지난 수십 년의 사회심리학적 연구를 통해 밝혀왔다. 굳이 가드너의 다중지능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똑똑함’의 기준을 특정한 한두 가지의 능력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경고가 학계에서는 이미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이러한 내용은 대중서적의 형태로, 다양한 미디어 메시지의 형태로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됐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의 공교육은 다양한 교과로 이루어진 교육과정을 통하여 개인이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스스로의 세계관을 쌓아 나가도록 하고 있다. 대학교에서의 교육 또한 파행적이다. ‘똑똑한’ 학생들을 경쟁적으로 선발하고 배치하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 이들을 무엇으로, 어떻게, 왜 가르쳐야 하는가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없다.

대학 간 경쟁에서 학생과 배움은 단지 중요한 수사적인 표현을 위한 대상일 뿐이다. ‘글로벌 리더’ ‘선한 인재’등의 용어로 지칭되는 학생들은 실제 대학 교육과정에서 지식 상품을 소비하는 소비자 이상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차려놓은 밥상에 초대된 손님처럼 인식되지만, 정작 그 밥상에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과 맛을 즐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것도 보장되지 않는다. 다만 비싼 값에 ‘주어진 것’을 소비하고 ‘지나갈 개인’일 뿐이다. 도대체 대학에서 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에 대해서 제대로 된 토론이라도 한번 있었던가? 교육과정을 포장하고 있는 ‘국가직무능력표준(NCS)’과 ‘역량기반교육과정’은 오로지 학생들에게 주어진 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뿐이다. 이를 잘 받아들인 개인들에게 ‘좋은 학점’과 ‘졸업’ 그리고 경쟁적 ‘취업’에서의 혜택이 주어진다고 믿는다.

다시 처음의 상황과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도대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똑똑한 사람들을 키워내고 있는 것일까? 그 대답은 간단하다. 2016년 대한민국의 교육은 오로지 자신의 명예와 권위를 높이고, 혼자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재산을 증식하도록 하는 데 신경 쓸 이기적인 ‘똑똑함’에 몰두하도록 만든다. 적어도 공식적인 교육과정과 제도 속 교육 관계자들은 누구하나 이를 오롯이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이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공범으로 매일매일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적어도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내가 하는 일이, 내가 선택하는 배움이 나와 나를 둘러싼 상당히 사적인 범위에 제한되는 것이라는 성찰과 비판이 필요하다. 교육정책가로서, 교육자로서, 학부모로서, 학생으로서, 그리고 한 사회의 시민으로서 가르침과 배움은 단지 한 사람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비판적 성찰 말이다.

배움은 특정한 지식 덩어리를 머릿속에 넣는 기계적인 행위가 아니라고 한다면 배움이 특정 지식의 덩어리를 넘어 그 지식을 감싸고 있는 사회적인 구조, 나 아닌 다른 사람들과 어떤 관계로 맺어지고 있는지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교육은 ‘내가 해봐서 아는데’의 태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보다 ‘당신의 배움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라는 태도가 되어야 한다. 사회와 그 속에서의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대우해 줄 것인가를 수동적으로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회와 그 속에 살고 있는 구체적인 개인들과 어떻게 관계 맺고 그들의 삶에 영향을 주고받는지, 보다 능동적이고 실천적인 태도를 갖도록 해야 한다. 적어도 ‘똑똑함’은 이러한 것이 자신의 바깥으로 표출되는 구체적인 것으로 인지돼야 한다.

부패를 척결하자는 이 시간 이 시대의 사명은 단지 누군가의 죄를 구체적으로 몰아 세우는 것에 그쳐서는 안된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회에서의 ‘똑똑함’이 한 개인과 사회의 구조적인 인식과 실천 그리고 이를 둘러싼 배움, 교육의 문화를 변혁하도록 해야 한다. 적어도 이 국가가 단지 내년에 어떤 정부를 만들 것인가의 고민에 그치지 않고 100년 뒤의 사회적 번영을 이야기해야 한다면, 바로 지금 우리 삶의 중요한 판단 기준을 바꾸어야 한다. 바로 지금 말이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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