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철 한신대 대학원장(비판사회학회 회장)

▲ 윤상철 한신대 대학원장

전 대통령 탄핵과 구속의 과정에서 한 교수 출신 수석의 영락을 지켜보았다. 정치참여형 지식인으로서 조세 및 재정 분야의 전문가이고 한때 시민단체에서 활동하기도 했던 이 사람은 직권남용과 수뢰를 넘나드는 국정농단의 핵심적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명품백 선물에 지식인으로서의 도덕적 자존심마저 내팽개친 추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외에도 청와대와 행정부 그리고 대학에서 그간 사회적 존경을 받아왔던 교수 혹은 교수 출신 지식인들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지당합니다’ 형의 전문성 부재와 측근챙기기와 뇌물수수 등의 도덕성 부재의 교수 출신 지식인들은 민주주의의 회복을 외치는 자리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대선캠프에는 수백 명씩 몰려들고 있다.

참여정부 청와대에서 정책실장 등을 역임했던 한 교수 지식인은 이른바 ‘폴리페서’라고 사회적으로 비난받기도 하는 교수의 정치참여를 적극적으로 두둔한다. ‘폴리페서’는 카리스마적 정치권위와는 다르게 지적ㆍ도덕적 권위를 내세워 관료들의 부처이기주의에 맞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세세한 정책수단 등에서 전문성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보다 객관적 입장에서 크고 넓게 볼 줄 아는 방향감각을 가진다고 기대한다. 가령 ‘분배정의’와 같은 가치는 지식인들만이 정부의 정책결정에 있어서 최우선의 규준으로 삼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보편적이고 인도적인 가치에 기반한 방향감각을 상실한 지식인들에게는 자리가 주는 위세와 권위 그리고 권력이 주는 달콤함 외에 그 무엇이 있으랴.

지식인들은 정치에 참여하여 자리를 취하거나 스스로의 가치와 전문성을 현실 속에서 실현하고자 한다. 너무 적극적이다 보면 목적과 수단이 전치되어 초심을 잃고 자리와 권력에 취하기도 한다. 그러한 가능성을 염려하는 지식인들은 아예 참여를 거부하거나, 설사 참여하더라도 실질직인 정책입안이나 실행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정치세력이나 시민사회 안에서 제한된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이른바 ‘배태된 자율성’을 통해 국가-시민사회 간의 시너지를 최고화하지 못하고 다른 한 극단으로 치우친 경우이다.

왜 이럴까? 혹여 이 시대가 지식인의 예언자적 권위를 더 이상 허용치 않는가 의심해본다. 인문학이 다시 르네상스를 맞고 있고 통섭의 첫머리에 인문학을 내세우는 최근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지성으로서의 인문학이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는 듯 보인다. 소설책 한 권 제대로 읽지 않고도 대학의 교수에 임용되고 취업공부에 인문학의 공간을 내주지 않는 학생들도 많다. 사회학에서 논리적으로 그럴 듯하고 경험적으로 인식가능한 주제들을 탐구하는 사회조사연구도 연구자의 의지가 경시되는 빅데이터 분석과 같은 새로운 방법 앞에 무너지고 있다. 경제학은 실물경제를 분석하고 예측하기 쉽지 않았지만, 신자유주의의 위기로 나타나는 자본주의 자체의 위기 앞에서 이른바 제4차 산업혁명의 와중에서 그 자리를 잃고 있다. 이미 많은 학문이 스스로의 지적 권위를 상실해가면서 그로부터 인격적 권위를 확보하는 지식인들의 위상 또한 추락하고 있는 듯하다. 반면에 대중들은 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지식을 습득한 세대이자 네트워크로 연결된 세대로서 극심한 불평등과 저성장의 미래를 철저히 인식하고 전혀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러한 가치와 이념의 권위를 상실한 지식인들이 수행할 수 있는 학문의 도구적 기능은 존재하는가? 제4차 산업혁명은 지적 권위를 인공지능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노동의 종말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제까지의 복잡하고 지적인 노동이 점차 축소되고 있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 이 상황에서 미래예측은 불투명하고 지식인이 대중에게 쥐어줄 현실적 도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예 그 변화 자체를 지식인들이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지식도, 가치도 지식인들의 독점적 혹은 지배적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지식인의 존재형태들이 두루 비난받는 이 시대에 지식인의 부재는 더욱 비관적이다. 제한적이나마 현실의 지식인은 삶의 좌표를 제시하거나 삶의 도구를 제시할 수 있다. 아마 우리는 지식인들이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보이는 부정적 행태를 목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식인이 시대상황을 명확하게 인식하면서 자신의 지식이 갖는 유용성과 가치에 회의할 수 있다면 지식인은 다시 그 존재의 의미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해본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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