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숙 지음 《영초언니》

<시사저널><오마이뉴스>편집장을 지낸 언론인이자, 대한민국에 제주 올레길 열풍을 일으킨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이야기이다.

대학 선배이자 필자가 얘기하듯 나쁜 언니 ‘천영초’라는 이름을 가진 한 여자와의 기록이다. 1970년대 말, 한반도의 끝자락 제주에서 서울로 올라와 대학생활을 하던 여대생 서명숙은 돌연 감옥에 갇힌다. ‘천영초’라는 여인과 함께. 이 책은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 저자뿐만 아니라 당시 긴급조치 세대 대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실존인물 ‘천영초’에 대한 기록이다.

영초언니는 서명숙에게 “담배를 처음 소개해준 ‘나쁜 언니’였고, 이 사회의 모순에 눈뜨게 해준 ‘사회적 스승’이었고, 행동하는 양심이 어떤 것인가를 몸소 보여준 ‘지식인의 모델’”이었다. 천영초는 ‘당시 운동권의 상징적인 인물’ 중 한명이었고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전태일’처럼 깊은 화인을 남긴 인물이었지만, 지금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천영초는 불의의 사고로 말과 기억을 잃어버렸고, 시대는 그녀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천영초와 서명숙, 두 여성의 젊은 날에는 박정희 유신정권 수립과 긴급조치 발동, 동일방직 노조 똥물 사건, 박정희 암살, 5.18광주민주화운동, 6월항쟁 등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촘촘하게 맞물려 있다. 저자는 언론인 출신 특유의 집요하고도 유려한 글쓰기로 독재정권하 대학생들의 일상과 심리적 풍경을 섬세하게 복원해나가며, 한 여자가 어떻게 시대를 감당하고 몸을 갈아서 민주화에 헌신했는가를, 그리고 그 폭압적인 야만의 시대에 얼마나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일을 겪었는가를, 그 결과 어떻게 망가져갔는가를 증언한다. 그 과정에서 나어린 여대생들에게 당대의 고문형사들이 가한 소름 끼치는 협박과 고문들, 긴급조치 9호 시대 여자 정치범들이 수감된 감옥 안의 풍경이 영화처럼 펼쳐진다.

한때 서명숙에게 영초언니를 회상하는 것은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이었고, 식은땀에 젖어 한밤중에도 소스라치며 일어나게 만드는 처절한 악몽이었다. 그래서 몇 번인가 이 원고를 쓰다가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몇 달 전 부패한 박근혜 정권 뒤에 숨어 국정을 농단한 최순실이 몰려든 취재진들 앞에서 ‘민주주의’를 입에 올리며 억울하다고 외친 순간, 그는 다시 영초언니를 떠올렸고 맹렬하게 원고를 집필해 마침내 ‘천영초’라는 여성의 초상을 완성해냈다.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는 어디쯤 와 있는가. 진짜 ‘억울’한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역사가 호명해야 할 이름은 누구인가. 서명숙의 펜 끝에서 되살아난 영초언니가 우리에게 묻는다. (문학동네 /1만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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