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희 제주한라대학교 교수

▲ 이종희 교수

다래끼를 우습게 봤다. 어릴 때 몇 번 다래끼가 난 적이 있었는데 엄마가 들기름을 발라주시거나, 속눈썹을 하나 뽑아 돌 위에 올려놓고 그 돌을 누군가가 차면 다래끼는 거짓말 같이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날 때가 되어서 나은 건지, 정말 주술적 효과가 있는 건지 참 알 길이 없다. 그리고 어원도 알 수 없는 일본어 병명의 ‘다래끼’라는 병은 내 뇌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이다.

그러던 것이 올해 여름 덜컥 눈꺼풀이 빨갛고 보기 흉하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다래끼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그저 가라앉겠지 하며 방치했다. 급기야 노랗게 염증이 생긴 후 안과를 찾았더니 다래끼 환자가 아직도 그리 많은지 처음 알았다. 짜고 약을 먹으면 낫겠지 하고 생각은 하였으나 ‘고깟 다래끼’하며 바쁘다는 핑계로 약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고 안약도 띄엄띄엄 넣었다. 세상에 우습게 볼 일은 하나도 없다. ‘고깟 다래끼’라고 업신여긴 것을 복수라도 하겠다는냥 요놈의 다래끼가 몇 달째 부었다 가라 앉았다를 반복하며 나를 완전히 골탕먹이고 있다. 병원에 갈 때마다 ‘다음엔 째야 할 것 같아요’라는 말을 듣고 찜질을 열심히 하면 가라앉았다가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빨간불 신호처럼 경계경보를 보내며 붓고 염증이 도지는 것이다. 의사들도 예측에는 한계가 있어 언제 낫겠다는 기약도 없이 항생제 처방만 해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하릴없이 면역력이 떨어진 내 건강과 나이만 탓하게 된다.

많은 이가 그러하듯 나도 젊은 시절에는 하루 이틀 밤새우는 것은 예사였고 다들 잠든 시간에 홀로 깨어 있는 고요를 꽤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잠이 보약’이라는 생각에 하룻밤만 제대로 못 자도 뒷날 고생할 생각에 벌벌 떠는 겁쟁이가 되어 버렸다. 젊음의 왕성한 생명력은 세상에 대해 진취적이고 도전적이게 하였으며 세상은 나에게 호의적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나는 어느 공간을 가든 나보다 젊은 친구들이 더 많은 나이가 되어버렸고 ‘나잇값’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위축되기도 하고 조심스러워 지는 것이다. 게다가 친절했던 세상은 냉정하고 엄격해지기도 했다. 나이와 더불어 책임져야 할 일이 많아지고 직위나 지위로 인해 작은 실수도 용납되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기 때문이리라.

인간은 많은 것을 직접 경험한 후에야 깨닫는지라, 자연스레 그리고 서서히 젊음이 사그라들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직접 닥친 후에 느끼는 감정은 감히 예측할 수가 없다. 하긴 상상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젊은이들에겐 가혹한 것이리라. 늙어감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다가올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므로 두려움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두려움을 잊기 위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아무리 암시를 걸어도 육체는 자연의 이치를 알아채라고 여기저기서 신호를 보낸다. 그래서 박노해 시인은 ‘가을몸’이라는 시에서 ‘이 몸 안에 무엇이 익어가느라 이리 아픈가, 가을이 물들어서 빛바래 가는 이 몸에 무슨 빛 하나 깨어나느라 이리 아픈가, 이리 슬픈가.’라고 노래한다. 내 몸이 시들어 가는데 아프지 않고 슬프지 않은 이가 그 누구이겠는가? 내 몸만 시드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사랑했던 이들도 함께 시들고, 때로는 미처 준비하지 못한 긴 이별도 해야 할 때가 있어 늙어감은 실로 더욱 슬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익어가는 거라고, 혹은 숙성하고 있는 거라고, 그래서 멋지게 발효될 것이라고 노래해야 하리라. 주어진 삶과 시간을 감사히 여기며 숙성과 발효에 걸맞은 일상을 영위해야 하리라. 성찰과 성장을 게을리 하지 않고 너그러움을 깊이 담아 숙성시켜야 하리라. 마침내 자신만의 향으로 발효되어 세상에 작은 빛 하나 깨칠 수 있다면 기꺼이 자연의 이치에 순응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파트 창 너머로 보이는 붉은 가을이 오늘따라 더욱 처연하게 눈부시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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