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시집 《파일명 서정시》

.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래 30년간 투명한 서정과 깊은 삶의 언어로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나희덕 시인이 신작 《파일명 서정시》를 출간했다. 2014년 임화문학예술상 수상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문학과지성사 2014) 이후 4년 만에 펴내는 여덟번째 시집이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사랑과 생명력으로 가득한 낯익은 세계에서 벗어나, 블랙리스트나 세월호사건과 같이 ‘지금-여기’에서 발생하는 비극과 재난의 구체적 면면을 시 속으로 가져온다. 표제작 〈파일명 서정시〉에서는 냉전기 구 동독 정보국이 시인 라이너 쿤쩨를 감시하며 작성한 자료집(‘Deckname Lyrik’, 파일명 서정시)을 소재로 차용해,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민간인 사찰이 자행된 우리의 현실을 짚었다.

시인은 서정시마저 불온한 것으로 여겨지는 세상에서 "시 쓰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으로 미처 하지 못했던 말, 그러나 해야 하는 말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어이없는 죽음들부터 자본주의의 균일적 사고와 착취까지 절망과 파국의 현장을 낱낱이 들추는 폐허의 시편들. 이것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처음 만나는 나희덕의 시, 처음 만나는 그의 ‘서정시’가 될 것이다.

나희덕의 시세계는 최근작들을 통해 변모와 전환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죽음과 부재와 결핍이라는 서늘한 세계에 발을 딛고 선 이곳에서 시인은 “이것이 인간인가”(〈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되물으며 “종이에서 시가 싹트리라 기다리지 마라”(〈종이감옥〉)고 선언한다. 어쩌면 시인이 처음 내뱉는 거칠고 직설적인 어법은 존재의 아픔과 곳곳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낱낱이 헤집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론이자, 이 자체로 새로운 미학을 향한 내면의 고투다.

삶의 숱한 참혹과 어이없는 죽음들 앞에서 시인은 무언가 말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무엇도 말할 수 없다는 절망감 사이에서 어떤 말도 무의미하고 무기력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 그러나 “문턱을 넘지 못한 사람들”과 “아직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기에 시인은 “간신히 벌린 입술 사이로 빠져나온 말들”과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말들”(〈문턱 저편의 말〉)을 뱉는다. 이 비명 같은 말들은 서로 이어져 말다운 말이 되고, 다시 다른 말을 불러내 끝내 노래가 된다.

파일명 서정시의 노래는 슬픔의 힘으로 죽은 자를 불러내고, 비극을 움켜쥐고, 폭력을 직시하는 노래다. 진혼의 노래이자 저항의 노래다. 하나의 노래가 끝나고 다시 새 노래가 시작되기 전 흐르는 침묵, 이 찰나의 침묵에서 시인과 우리는 “죽어가는 존재들도/여기서는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여기서는 잠시〉)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시인은 고대 인도의 탄센 설화, 구동독 정보국이 시인 라이너 쿤쩨를 사찰한 기록,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쁘리모 레비의 증언,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의 작품, 끌라우디아 요사 감독의 영화, 공동체주의자 찰스 테일러 등 다른 장르의 텍스트를 재구성해낸다. 세계의 참혹을 응시하는 다른 눈들과 눈을 마주치며,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부르는 자신의 노래가 여전히 아름다운 화음이 되기를 바라며.

나희덕은 196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돼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창비 / 9000원)

저작권자 © 한국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