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종 / 본지 논설위원, 전 경희대 교수

한국의 대학들은 한국의 학벌주의를 먹고 자라며 비만증에 걸리더니 그중 일부는 골다공증처럼 강의실이 비어 가고 있다. 물론 한동안은 이 학벌주의 때문에 인재들도 많이 배출되었지만 그 역기능도 보통이 아니다. 한국형 학벌주의는 다음 세가지다. 동문끼리만의 배타적 파벌주의, 그리고 수능고사 성적표가 만들어 내는 대학 서열주의, 그리고 학문적 지위에 의한 권위주의등 세가지가 모두 학벌 주의에 해당된다. 이중에서 앞의 두 가지가 저지르는 횡포는 흔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세번째 학벌주의가 지니는 횡포에 대해서는 별로 눈여겨 보지 않는 것같다. 박사 석사 학사 고졸등의 학벌은 비록 형식적 용어지만 그것은 학문의 지위를 말하는 기준으로 쓰인다. 그렇다면 이 학벌은 어디까지나 그에 맞는 필요한 자리에 적용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학벌이 아무데서나 설쳐 대며 위세를 부린다. 그리고 남들의 일자리까지 부당하게 빼앗는 것이다. 예전에는 여상만 잘 나와도 은행 창구 업무는 그들 차지였다. 다른 직장들도 비슷했다. 그래서 가정 형편 때문에 실업 고교만 나와도 그 나름대로 희망이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 자리를 대졸들이 차지하고 있다. 높은 학벌이 낮은 학벌을 밀어 내는 것이다. 이 경우에 고학력이 저학력보다 그 자리에 더 적합하다면 할 말이 없다. 그렇지만 고졸만으로 충분한 자리라면 그 자리를 대졸이 차지하는 것은 부당한 학벌의 횡포가 아닌가? 교수가 되지 못한 박사님이 용기를 내어 구두 닦이가 되는 것은 장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가난하거나 공부를 잘 하지 못해서 학벌이 없는 사람들이 차지해야 할 자리이며 그것은 그들을 위해서 남겨져 있어야 다같이 더불어 사는 사회가 된다. 그런데 어디서나 고학력이 저학력을 밀어 낸다면 부득이 저학력이 된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하나? 그리고 지금 실제로 이 학벌주의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역기능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다. 어느 고교 교사는 대학진학 못하는 반 학생들의 슬픈 얼굴만 보면 자기도 세상이 슬퍼진다고 했다. 그리고 또 정말 부당한 것은 선진국에는 거의 없는 예술 대학이 이 나라의 천재들을 희생시키고 있는 현상이다. 배우 화가 피아니스트 성악가 시인 지망생들이 거의 모두 4년제 대학 진학을 희망한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학벌이 그들에게 왜 필요하며 교육부가 그런 대학을 만든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 대부분은 학문하기 위해서 예술대에 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주로 실기 지도를 받는 학생들이며 졸업 논문이 아니라 실기로 졸업 자격 평가를 받고 나온다. 그렇다면 그곳은 대학이 아니다. 대학은 학문을 하는 곳이니까. 그런데도 이런 대학에 가는 이유는 학벌주의의 강요 때문이다. 그리고 이 대학에 가기 위해서 그들은 얼마나 많은 것을 잃고 지쳐 있어야 하나? 사람은 보통 스무살 때까지 무럭무럭 자라듯이 타고 난 천부적 재능도 그 때 키워야 가장 많이 자란다. 그런데 그들은 천재성이 번득이고 쾅쾅 자랄 나이에 온갖 무용지물 입시과목에 매달려서 시간과 졍력을 낭비한다. 영어나 수학에 매달리는 시간에 그림에만 그만큼 매달리면 이미 천재화가가 될 수 있을지 누가 알랴? 서태지가 그런 공부에 매달려서 일류대학에 갔으면 그렇게 스타가 될 수 있었을까? 세계적인 화가 음악가 문인등 모든 예술가들이 그런 무용지물에 매달렸다면 과연 그런 인재가 될 수 있었을까? 지금의 학벌주의는 대학 아닌 대학까지 만들어서 천재들을 그곳으로 밀어 넣기 위해 그들의 정력과 시간을 다 빼앗고 천재를 죽이고 있다. 이런 학벌 주의가 없고 천재들이 이런 이상한 대학에 가기 위해 시험공부에만 매달리지 않는다면 한국에서는 정말 세계적인 천재들이 벌써 수없이 나오고 또 그들이 창출해 내는 문화 때문에 나라도 훨씬 좋아졌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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