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형찬 서울예술대학교 교수

백형찬 서울예술대학교 교수
백형찬 서울예술대학교 교수

갓 쓰고 도포를 입은 한 무리 사람들이 가파른 고갯길을 오른다. 이윽고 정상에 도착하니 구름바다 건너 저편에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일만이천 봉이 펼쳐진다. 신선들이 사는 세상이다. 하늘 아래 다시 없는 절경이다. 사람들은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다.

겸재 정선이 그린 ‘斷髮嶺望金剛山’이다. 그림을 구경하는 사람은 마치 새가 돼 하늘에서 단발령과 금강산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단발령은 금강산 초입에 있는 고개이다. 신라의 마의태자가 나라를 빼앗기자 그 설움에 아버지 경순왕에게 하직하고 출가를 결심한다. 곧바로 금강산으로 입산해 단발령에서 삭발했다고 전해진다. 그림 속의 사람들은 겸재의 일행이다. 겸재는 서른 살이 훨씬 넘어 처음으로 금강산을 구경했다. 평생 친구였던 김화 현감 이병연이 겸재를 금강산으로 초대한 것이다. 겸재가 화가로서 이름을 크게 떨친 것도 금강산을 그리면서부터였다. 누가 나에게 겸재 그림 중에 가장 좋아하는 작품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이 그림을 꼽을 것이다. 이 그림을 작년 가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처음으로 보았다. 그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40센티가 채 안 되는 작은 그림인데 유리 안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그림을 가깝게 들여다보니 나도 마의태자처럼 속세와 이별하고 금강산으로 입산하고픈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겸재는 숙종 때 서울에서 태어나 영조 때까지 활동했다. 당시 대단한 권력가였던 김 씨 형제들(김창집, 김창협, 김창흡, 김창업)이 겸재를 후원했기에 평생 벼슬을 하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마흔 중반에 하양 현감(종6품)을 시작으로 의금부 도사, 청하 현감, 양천 현령이 됐고, 여든이 넘어서는 동지중추부사(종2품)까지 지냈다. 겸재는 우리 강산을 무척이나 사랑했다. 전국을 유람하며 그 시대와 그 풍경을 그림으로 기록했다. 조선화가 중에 가장 많은 그림을 그린 사람이 겸재가 아닐까 싶다. 그는 평생 금강산을 눈에 담고 살았다. 돋보기를 겹겹이 갈아 쓰면서까지 금강산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겸재의 그림을 실경산수라 하지 않고 ‘진경산수’라 한다. 진경산수는 중국의 화풍을 배제하고 우리 눈으로 우리 강산을 직접 보고 느낀 그대로 그린 그림이다. 그래서 진경산수에는 이념이나 사상이 들어가 있지 않고 순수하다.

서울 강서구 마곡동에는 겸재정선미술관이 있다. 그곳에 겸재미술관을 건립한 이유가 있다. 겸재는 예순다섯에 양천 현령으로 발령을 받았다. 양천(陽川)은 이름 그대로 햇살이 밝게 빛나고 맑은 내가 흐르는 아름다운 곳이다. 양천의 그 수려한 풍경을 보고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부임하자마자 붓을 들고 그 아름다운 풍광들을 기록했다. 그리해 한강 변 절경이 담긴 ‘양천 8경’ 화첩이 탄생한 것이다. 내 연구실에는 소중히 여기는 겸재 관련 책과 자료가 있다. 간송미술관 최완수 선생이 지은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여행’,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겸재 서거 250주년을 기념해 만든 ‘붓으로 펼친 천지조화 겸재 정선’, 조정육 선생이 쓴 ‘붓으로 조선 산천을 품은 정선’이 있고, 왜관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2017년에 제작한 겸재정선화첩 캘린더가 있다. 캘린더에는 금강내산전도를 비롯해서 연광전도, 구룡폭포, 압구정도, 함흥본궁송도 등의 명작들이 실려 있다. 겸재정선화첩은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여든 해 동안 비밀스럽게 보관해 오다가 왜관 베네딕도 수도원에 영구적으로 임대해 준 것이다.

얼마 전, 겸재의 또 다른 화첩인 ‘정선필해악팔경도 및 송유팔현도’가 경매로 나왔다. 금강산과 동해안 풍경을 그린 그림과 송나라 유학자들의 일화를 그린 그림들인데 보물로 지정된 국가문화재이다. 추정가가 무려 70억 원이다. 낙찰된다면 국내 고미술 경매 사상 최고가로 기록될 것이다. 그 화첩에는 내가 그토록 갖고 싶은 단발령 그림이 들어있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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