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택 고려대학교 총장

얼마 전 기업과 사회 그리고 정부를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하고 있는 주요대학 총장들이 미래대학의 모습을 논의하기 위해 모인 자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날 참석자들은 교육 혁신이나 미래대학과 관련 있는 주제를 입에 담지 못했다. 교육부 감사에 대한 아픈 경험을 토로하고, 비영리 목적 교육용 부지에 대한 재산세 부과 가능성을 우려하며, 12년째 동결된 등록금 때문에 가뜩이나 어려운 재정상황 속 학생들의 등록금 반환 요구 관련 대책을 강구하는 논의들만 하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대학에서조차 격변의 시대에 필요한 대학의 국제 경쟁력, 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기발한 연구 성과, 미래사회와 차세대를 준비하는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나라 고등교육의 현실도 암울하지만 미래는 더욱 참담하다는 우려를 지울 수가 없었다. 

학령인구 감소로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지방대학의 어려움은 지방대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가정형편상 서울로 가지 못하는 지역 우수인재 양성의 산실이었던 지방 국립대의 존재감이 줄어든 것도 지방 국립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학생들이 예전에 비해 여대보다 남녀공학을 선호하는 것도 여대만이 고민하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아니다. 학령인구 감소에 따라 서울 주요대학조차 입학생들의 평균 학업능력이 예전 같지 않은 것도 그 대학이 알아서 해결할 문제만은 아니다. 현재 한국 대학이 안고 있는 이런 현상의 원인은 저출산에 의한 인구 감소, 그리고 국민들의 인식 변화에 기인한 사회적 문제다. 나라의 경쟁력, 나아가 미래를 결정짓게 될 사회적 문제는 당연히 국가의 핵심 의제가 돼야 하며, 정부와 대학이 함께 해결할 공동의 과제여야 한다. 

우리가 당면한 고등교육 문제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 같은 고민을 해온 다른 나라의 사례를 살펴보자.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로서 고등교육 정책 역시 국가가 주도적으로 중장기 목표를 설정하고 체계적으로 시행한다. ‘211공정’은 1991년 덩샤오핑이 21세기 100개 일류대학을 세워야 한다며 시행한 중국 최초의 대학 프로젝트로 10년간 6조2600억원을 투입했다. 1998년 북경대학 개교 100주년 기념식에서 장쩌민 국가주석이 현대화 건설을 위해 일부 중점대학을 세계일류대학으로 육성시킨다고 선포, 1999년부터 8년간 12조원을 투입한 ‘985공정’도 있다. 2015년에는 중국 국무원이 ‘세계일류 대학 및 세계 일류학과 건설을 위한 총체적 방안’을 발표했다. 이것이 중국 대학의 놀라운 도약을 가져온 ‘쌍일류(雙一 流)’ 프로젝트다. 일부 제조 기업들이 자사 생산량을 비교할 때 중국 기업을 제외하고 비교하듯이 이제 대학 경쟁력을 논할 때 일부 일류 중국대학은 규모나 성과 면에서 비교의 대상이 되기 어려울 정도로 성장했다.

미국은 반대로 시장경제와 고등교육을 선도해온 자유주의 국가답게 혁신·융합·개방에 초점을 맞추고, 각 대학이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변화와 혁신을 시도하고 있다. 당연히 대학의 이러한 노력에 대한 정부의 규제나 감시는 최소화돼 있다. 그 결과 온라인 플랫폼을 구축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교육서비스를 제공하고, 국제 공동연구, 미래 기술 개발, 평생 교육 등을 선도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기업과 연계한 다양한 산학 프로그램을 통해 창업 지원, 스타트업 육성, 벤처투자 유치 등 대학 재정에 도움이 될 지식사업화 생태계도 자연스럽게 활성화됐다. 캠퍼스가 없는 미네르바 대학, 애리조나주립대의 교과과정 혁신, 스탠퍼드대의 미래교육 실험인 스탠퍼드 2025, 카네기멜론대의 슈바츠 기업가정신 센터 등은 미국대학의 수많은 변화와 혁신 중에서 잘 알려진 일부 사례들이다.

저출산에 의한 인구감소와 고령화라는 사회적 상황이 우리나라와 비슷한 일본은 장기적으로 국내 경제활동 인구 감소를 대비하고 있다. 해외 유학생을 유치해 우수 인재로 육성하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유학생들의 일본 내 취업률을 높이기 위해 정부와 대학이 협력한다. 영어권 유학생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일본대학들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 문부과학성 주도로 37개 거점대학을 선정해 국제화를 추진했다. 세계적 수준의 교육·연구를 하는 글로벌 대학으로의 성장을 중점 지원하는 ‘Top Global University Project’를 2014년부터 10년간 진행하고 있다. 특히 국제화는 일본정부가 역점을 두는 일본대학 혁신의 화두다. 일본경제단체연합회도 ‘향후 일본의 대학개혁에 대한 제언’을 공표하면서 대학 개혁에 관심을 보였다.

방법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 3개 국가는 시대적 변화에 따른 고등교육의 변화를 국가적인 어젠다의 하나로 설정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하거나, 대학 스스로 혁신이 가능하도록 자율권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도 범정부 차원에서 고등교육의 경쟁력 제고와 혁신을 핵심 의제로 삼아 구체적인 발전 방향을 제시하고 적극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

16년 전 서울시 주관으로 ‘대학 담장 개방 사업’이 진행된 적이 있다. 녹지가 많은 대학 캠퍼스를 개방해 공원이 부족한 서울 지역 주민들에게 혜택을 주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캠퍼스 관리와 안전 문제 때문에 많은 대학에 확산되지는 못했다. 

현재 우리 사회에도 많은 벽이 존재한다. 수도권과 지방 간의 벽, 중앙정부와 지자체 간의 벽, 기업과 감시기관 간의 벽, 대학과 교육부 간의 크나큰 벽. 울타리는 확실하게 피아를 구분하며 보이지 않는 적대감을 가져온다. 지금은 새로운 가치를 만들기 위한 융복합의 시대다. 이제는 물리적인 담장은 물론 마음의 담장을 허물고 모든 이해당사자가 힘을 합치며 지혜를 모아야 한다. 대학과 대학, 대학과 정부, 그리고 대학과 기업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진정 국가를 위한 확실한 비전을 제시하며 국가 전체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대학도 개별적인 어려움을 토로하기보다는 각 대학의 장점과 특징을 공유하고 상생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지자체와 기업도 대학과 협업해 지역과 경제생태계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정부가 ‘대학이 국가의 미래’라는 확실한 비전을 제시하고 협력과 협업과 상생을 논의할 플랫폼을 마련해야 한다. 대학은 대한민국의 미래이자 희망제작소이기 때문이다.

본지가 창간 32주년을 맞아 희망 대한민국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코로나19, 학령인구 감소 등 어려움에 직면한 대학들을 격려하고, 희망의 메시지로 내일을 향해 나아가자는 취지에서입니다. 캠페인은 참여한 대학 관계자 및 저명인사들이 다음 주자를 지목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편집자주>

다음 기고자는 김도연 울산대 이사장(전 포스텍 총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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