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규 중앙대 HK+ 인공지능인문학사업단장(국어국문학과 교수, 국가교육회의 위원)

모두가 교육이 문제라고 한다. 교육 시스템도 엉망이고, 선생님은 열의도 없으며, 오히려 교육이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한다. 그래서 자살률도 높다고 한다. 독일식 교육이 정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기야 그 비싼 학비에도 외국학교의 인기는 높으며, 심지어 교육 때문에 이민을 가는 사람도 있으니 전혀 터무니없는 주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결과적 현상 이면에 그럴 수밖에 없는 아픈 사정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 교육을 몰아세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나라 현대 교육의 아픔은 일제 강점기로부터 시작된다. 일제는 식민지 강압 통치를 위해 제국주의 교육 방식을 적용했다. 이 때 대학을 다닌 사람들이 광복 후에 교사나 교수가 돼 자신들이 배운 방식으로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그 분들이 아니면 선생님도 없었으니 어쩔 수 없는 아픔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유럽처럼 식민지 개척을 통해 부를 축적하지도 못하고, 시간을 갖고 세계 최고의 기술을 가진 제조업을 육성시키지도 못한 상황에서 국토를 강점당한 채 36년을 시달려야만 했다. 곧바로 이어진 전쟁의 폐허 속에서 우리는 생존을 걱정하는 시기를 지내야 했다. 빈곤에서 벗어나고자 경제 부흥에 매달려야 했던 시기에는 창의적인 사람보다는 성실하고 말 잘 듣는 사람이 더 필요했다. 교육도 그걸 강조해 개근상을 중요시했다. 비판적 문제해결보다는 묵묵히 잘 외우는 사람이 성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기조는 자연스레 엘리트 교육으로 이어졌다. 과거제도와 양반 사회의 오랜 전통은 엘리트층 형성의 기반 토대가 됐다. 과학·예술·체육 등의 분야에서 엘리트 교육이 실시됐고, 일반 초중등 교육에서도 특별반이 운영됐다. 한 반에 60명이 넘는 학생들을 선생님 혼자 세심하게 배려하며 교육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에 규율과 질서가 강조됐다. 성공한 사람이나 실패한 사람이나 모두가 정해진 틀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의 개성을 묻어 둬야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모두가 앞만 보고 달려야 했기에 지치고 불안했다. 

모든 상황이 힘들었던 시기에 교육만 엉망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억울한 면이 있다. 우리나라 입시가 여러 번 변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압축 성장으로 인해 인재 육성에 관한 사회적 요구가 빠르게 변했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 

다행히도 우리는 강하고 부지런했으며, 똑똑했다. 빈손으로 해방된 지 50여 년만인 1996년 선진국만 가입한다는 OECD 회원국이 되됐다. 2020년 현재 국민소득이 3만불을 넘었으며, 촛불만으로 정권 교체를 이뤄냈다. 코로나19 모범 방역국으로 세계의 존경을 받을 만큼 성숙한 사회를 구축했다. 이제는 모두가 아픔을 견디면서 서로를 닦달하지 않아도 될 만큼 여유가 생겼다. 

긴 역사로 보면 이제 막 한 숨 돌리게 됐는데 여전히 엉망이라고 아우성인 사람들이 많다. 특히 교육 문제에서 그렇다. 교육이 바뀌려면 30년을 준비해야 한다. 교육 시스템이 바뀌어야 하고, 공간도 바뀌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선생님들이 바뀌어야 한다. 선생님들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쓱싹 바뀌는 변신 로봇이 아니다. 국가적으로 치밀한 전략을 세워 재교육 과정을 제공해 줘야 하며, 능동적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폭주하는 업무량도 줄여줘야 한다. 교육은 하루아침에 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변화는 대학에서 더 적극적이고 다양하게 일어나야 한다.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대학이 혁신을 이뤄내야 초중고에서 그것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도 우리 아이들은 여전히 선도부가 교문을 지키는 중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암기를 잘해야만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대학을 들어가는 것이 인생의 최대 성공인 사회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 교육을 독일식으로 바꾸자고 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우리 국민들 대다수는 초등학교 4학년 시기에 인문학교로 진학할지, 직업학교로 진학할지를 결정하는 독일식 교육에 동의할 수 없다. 제조업이 발달해 고졸이나 대졸의 임금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 사회와 우리를 동일시할 수도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교육 문제는 어떤 점에서는 사실 교육 문제라기보다는 사회 문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자살율이 높은 것도, 학교 폭력도, 극심한 경쟁도 그 뿌리에는 불공정한 경쟁, 경제적 세습, 지역적 불평등, 차별의식, 극심한 빈부격차와 같은 사회적 병폐들이 있다. 

교육에는 늘 두 가지 관점이 상충한다. 개인적 욕구와 사회적 요구다. 개인적인 욕구는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려는 욕구와 잘 교육받아 안정적으로 살고자 하는 욕구로 구분된다. 우리 사회가 급속 성장을 하면서 전자보다 후자에 경도돼 온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다 보니 교육을 통해 사회가 성숙해져야 하는 사회적 요구로서의 교육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아팠던 우리 과거의 시행착오들에 대해 냉정하게 분석하는 것은 적절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했던 아픔을 묵살하고 지난 시절의 교육을 단지 힐난하고 매도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런 무자비한 비난에 대해 지난 수십년 열악한 교육현장에 새겨진 수많은 땀방울들은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우리는 현재 더 큰 변화의 흐름에 놓여 있다. 세계는 이미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여 우리나라에서만 잘하는 것이 별반 의미가 없을 정도로 개방됐다. AI라는 무시무시한 존재가 인간 사회의 모든 구석으로 스며들고 있다. 우리나라의 문화적 특성상 AI의 도입이 가장 빠를 것으로 예상되기에 이제는 교육 전반이 또 다시 변해야 할 시기가 됐다. 정부는 오로지 교육의 측면에서 다양한 고민들을 숙의하고자 대통력 직속 자문기구인 국가교육회의를 구성했다. 엘리트가 교육 정책을 주도하는 과거 방식에서 탈피해 시민이 교육 정책 수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가고 있다. 빠른 시기 안에 독립적이며, 정파를 초월한 미래 교육 전담 기구인 ‘국가교육위원회’가 설립돼 교육에 관한 개인적 욕망과 사회적 요구가 만나는 지점을 모색해 내길 기대해 본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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