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 / 본지 전문위원, 충남대 언론정보학과교수

‘얼짱’ 신드롬이 거세다. ‘스타 보증서 인터넷 얼짱’(대한매일) ‘6세 인터넷 얼짱 인기몰이’(대한매일) ‘인터넷 얼짱에서 스크린?TV 샛별된 박한별’(조선) ‘얼짱 이어 노래짱 열풍’(동아) ‘얼짱 남상미 나도 스타’(동아) ‘여고 농구선수 신혜인 스포츠 얼짱 1위’(조선) ‘얼짱 신혜인 신세계로’(세계). 최근 얼짱을 제목에 내세운 신문기사의 극히 일부다. 얼굴이 잘 생긴 사람을 뜻하는 중고생들의 은어가 인터넷을 지배하더니 마침내 종합일간지를 점령한 것이다. 얼짱 열풍이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현상 중 하나일 수는 있다. 새로운 풍조인 만큼 언론이 이를 화제나 흥밋거리로 다룰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취급은 경계의 대상이다. 뉴스가치의 중요도를 판별하는 언론의 기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배우는 연기로, 가수는 노래로 승부를 겨루어야 한다는 주문은 지극히 당위적이다. 그래서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계의 속성상 외모가 이 바닥에서 생존하기 위한 필요 조건이라는 현실까지 시비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운동선수들에게까지 얼굴이 한 밑천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이만저만한 주객전도가 아니다. 여자 프로농구 신인 드래프트를 보도할 경우 1순위가 누구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그런데 문화일보만이 ‘정미란, 1순위로 금호생명 행’을 제목으로 뽑았다. 나머지 신문들은 모두 4순위지만 얼짱인 선수를 부각시켰다. 며칠 전 끝난 LPGA 투어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하루아침에 신데렐라가 된 한 골프 선수도 타고난 외모의 덕을 톡톡히 보면서 인기몰이 중이다. 사실 외모 지상주의를 부추기는 언론의 관행은 얼짱이라는 신조어를 만나 최근 기세를 올리고 있기는 하지만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특히 ‘화면발’을 중시하는 텔레비전의 경우 지나친 다이어트 열풍을 비판하는 뉴스를 다루면서 이를 전하는 여성 앵커들은 한결같이 젊고 예쁘고 날씬한 사람들 일색인지 오래다. 한때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한다는 취지의 프로그램이 방영된 적이 있었다. 이 프로그램이 성형수술을 부추긴다는 지적을 받은 것이 우리나라 방송의 현실이다. 뉴욕타임스의 한 칼럼니스트는 ‘루키즘’(lookism)이라는 용어를 통해 인종, 성, 종교에 이은 새로운 차별 기제로 외모에 주목한바 있다. 그리고 언론의 관행이 이를 확대 재생산한다고 꼬집었다. 언론은 겉치장을 우선시하는 세태를 점잖게 개탄한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은 외모에 따라 뉴스가치를 부여하는 관행을 키우고 있는 셈이다. 이는 마치 입만 열면 정직하게 살라고 잔소리하는 어머니가 아이에게는 “할머니에게 전화 오면 엄마 없다고 해”하는 식으로 이율배반을 조장하는 격이다. 어머니는 잔소리를 통해 비로소 뭔가 좀 가르쳤다고 뿌듯해할지 모르나 그 아이는 결코 정직한 사람으로 자라지 못할 것이다. 얼마 전 또 다른 신드롬을 일으키며 화려하게 막을 내린 한 드라마가 있었다. 젊은 층 사이에서 수많은 명 대사를 회자케 했는데 그 중 이런 말도 있었다. “희망이라는 것은 원래 있는 것이라 할 수도 없거니와 없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부터 땅 위에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면 곧 길이 되는 것이다.”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엽의 격동기를 온 몸으로 살다간 고뇌의 중국인 노신(魯迅)의 작품인 『고향』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나래이션을 차용한 것이다. 땅 위의 길이 그러한 것처럼 언론의 관행도 본래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지금 얼짱 보도를 통해 외모 지상주의가 언론의 관행으로 굳어지고 있는 중이다. 희망도, 관행도 그렇게 만들어진다. 언론이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잣대로 외모를 앞세울 때 얼짱이 안될 수밖에 없는 자라나는 세대의 대다수는 어떤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 노신에게 희망은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현실 속에서, 묵묵히 다져진 좌절감 위에서야 비로소 싹틀 수 있는 것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말쑥함과 화려함만을 조명하는 언론에 큰 기대를 걸었다가는 낭패만 보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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