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 충남대 교수 / 본지 전문위원

한 학회에서 출판 예정인 언론학 교재용 도서의 한 장을 집필했다. 이렇게 운을 띄웠다. “‘이윤은 기업 활동의 목적이 아니라 결과다.’ 수백억원 가치의 컴퓨터 백신을 10년 이상 무료로 보급해온 ‘컴퓨터 업계의 슈바이처’ 안철수 사장의 말이다. 이 말이 남다른 울림을 갖는 까닭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존경쟁이 치열한 탓에 많은 기업들이 오로지 이윤추구만을 지상과제로 삼는 비뚤어진 현실 때문이다.” 우연찮게 이를 읽은 동료 교수의 비판은 신랄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의 목적은 덜고 보탤 것도 없이 이윤추구라는 것이다. 따라서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목매다는 현실을 비뚤어진 현상이라고 볼 수 없다는 얘기다. 그게 사실일지 모른다. 난 어쩌다가 자본주의란 냉혹한 체제를 낭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것일까. 그 연유를 찾아 지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작심을 했다. 일은 너무 쉽게 끝났다. 뉴스보도를 통해 피터 드러커의 타계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로 불린 피터 드러커는 경영의 ‘효율성’보다 그 주체인 ‘사람’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시종 “노동자를 부품이 아닌 인간으로 대우하라”고 일갈했다. 난 한때 그의 서적들을 탐독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최근까지도 피터 드러커의 영향을 받은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의 다음과 같은 말을 금과옥조처럼 새기고 있었다. “사람은 비용이 아니라 자원이다. 대부분의 기업은 사람을 비용으로 보고 인건비 줄이기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사람에게 투자되는 10%의 비용을 13%로 늘리면 나머지 90%의 다른 비용을 80%로 더 크게 줄일 수 있다.” 피터 드러커에서 시작해 안철수, 문국현을 읽으며 난 자본주의, 그리고 그 최전방에 위치한 기업이 반드시 냉혈한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기대를 품은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가 냉엄한 현실이라면, 아니 그렇기에 더 더욱 경영만큼은 따뜻한 인간의 얼굴이길 바란 것이다. 부모가 이혼한 뒤 비닐하우스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지내다 기르던 개에 물려 죽은 아홉 살 소년. 엄마가 공장에 야근나간 사이 집에 불이 나서 죽은 네 살과 두 살배기 아이들. 자본주의 경제는 이들을 쉴 새 없이 양산한다. 정부는 시장의 사각지대에조차 마치 ‘행동하지 않음’(inaction)이 미덕인 양 손을 뻗치지 못하고 있다. 지난 주 학생들이 제주도로 졸업여행을 다녀왔다. 누군가 요즘도 외국으로 졸업여행을 가지 않고 제주도로 가느냐고 물었다. 20만원이 부담스러워 평생 한번뿐일 졸업여행마저 포기하려던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우리 대학도 법인화 대상이다. ‘점진적으로’란 단서가 붙었지만 국립대조차 시장에 내몰릴 경우 학생들이 부담해야 할 등록금이 오를 테고 기초 학문분야는 천덕꾸러기 취급당할 것이 자명하다. 자본주의 경제논리가 그렇게 가닥을 잡을 것이다. 이윤 극대화에만 골몰하는 경영 마인드는 비로소 제 물 만난 물고기일 터다. 교재용 책의 도입 문단을 수정하지 않았다. 현실이 척박할수록 꿈은 더욱 절실해지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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