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학과 묶어 전문성 부족. 수요따라 1~5년 자율로



“일부 4년제 대학은 학생들에게 미안한 줄 알아야 한다.”

모 전문대학 기획실장의 일갈이다. 그는 4년제 대학이 전문대학의 ‘돈 되는’ 학과를 가져간다고 격분했다. “2년만 가르쳐도 충분한 과정을 4년제 대학이 가져간다. 그럼 더 깊이 있게 가르쳐야 하지 않나. 그런데 그렇게 못 한다. 그러니까 2년 동안 교양만 가르친다. 전공수업은 2년뿐이다. 전문대학과 다른 게 도대체 뭐냐. 그럴 바엔 등록금이라도 깎아 주어야 하지 않나.”


유연하지 못한 학제

고등교육의 두 축은 4년제 대학과 전문대학이다. 둘은 성격이 다르다. 4년제 대학은 연구 중심, 전문대학은 직업교육 중심이다. 문제는 4년제 대학이 전문대학을 넘보면서 발생한다. 당장 취직할 수 있는 학과에 학생이 몰리니 명칭만 바꿔 학과를 개설한다. 안경광학과, 관광학과, 애완동물학과, 피부미용과, 치기공과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비슷한 학과를 졸업해도 전문대학 졸업생은 한 단계 낮은 취급을 받는다. 전문대학 간호학과가 그렇다. 전문대학을 나오면 수간호사가 될 수 없다. 외국진출에도 불리하다. 상황이 이러자 전문대학을 졸업한 학생은 4년제 대학 간호학과에 편입하기도 한다. 시간 낭비, 돈 낭비다.

OECD국가들은 수업연한에 제한이 없다. 사회변화에 맞춰 탄력적으로 학과를 운영한다. 우리나라는 4년제와 2년제로 고정돼 있다. 이 고정된 학제 때문에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직종에 따라 수업연한을 자율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다.

구동수 민주당 전문위원은 “수업연한을 풀어 줘야 전문대학이 바로 설 수 있다”고 말한다. 전문대학은 그동안 4년제 대학과 고등학교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교육기관, 혹은 4년제 대학의 하급학제 취급을 받아 왔다. 수업연한 자율화는 이 문제를 풀 열쇠라는 뜻이다.


10년 동안 줄기차게 요구

전문대학은 지난 10년 동안 수업연한 자율화를 요구해 왔다. 수요에 맞춰 학과를 1~5년으로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다. 지난 1999년 7월 ‘전문대학 교육발전을 위한 건의’가 시초다.

전문대학은 당시 “다수의 기술계 학과들을 2년으로 제한해 교육목적에 따른 인재를 양성하지 못하고 있다”며 “학칙으로 수업연한을 자율화할 수 있게 고등교육법시행령을 개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10년이 지나도록 정부는 ‘검토해 보겠다’는 대답만 되풀이하고 있다.

‘학사학위 전공심화과정’은 그나마 전문대학의 숨통을 열어 준 제도다. 지난해 고등교육법이 바뀌면서 66개 대학 242개 학과가 인가를 받았다. 올해 2916명의 졸업생이 다시 전문대학의 문을 두드렸다.

문제는 정부가 수업연한 자율화에 전공심화과정을 조건으로 내건다는 데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후보 시절 수업연한 자율화를 공약으로 내건 바 있다. 공약집 162쪽이다.

“4년제 대학이 학문 위주 교육만이 아니라 실용 전공과 직업교육까지 영역을 넓히는 반면, 전문대학은 각종 규제에 묶여 직업교육의 경쟁력까지 약화되고 있다. 전문대학의 수업연한 규제를 터 주어서 우수한 대학이 될 수 있도록 보장하겠다.”

그렇지만 약속은 현재 지켜지지 않고 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전문대학 학사학위 전공심화과정을 3년간 운영한 후 성과 분석 및 평가 결과에 따라 전문대학 수업연한 자율화를 검토할 방침”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보장’이 ‘검토’가 돼 버렸다.

김호동 서울예술대학 교수는 이를 두고 “인수위 내부에 전문대학의 목적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든다”고 지적한다.


정부의 부정적인 태도

정부는 왜 수업연한 자율화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일까. 이용순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선임연구원은 “일정한 요건을 갖춘 학과에 자율을 주자는 건데, 그 기준이 애매하다. 그리고 한 번 설치된 후에는 사후 성과를 평가해 퇴출하기도 어렵다”고 말한다. 혼선이 생길 우려가 크다는 말도 나온다.

최용섭 광주보건대학 기획실장은 이런 지적에 대해 “정부가 규제를 풀어 준다 해도 문제는 발생치 않을 것”이라고 반박한다. 그는 3년제로 전환한 보건·의료계열을 예로 든다.

“간호·보건계열을 3년제로 바꿀 때 처음엔 심사를 했다. 하지만 곧 심사과정을 없앴다. 욕심을 부려 만들다 보면 자연스레 경쟁력이 떨어지고, 학생이 오지 않기 때문에 알아서 포기하는 대학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수업연한 자율화의 성공 여부는 수요자인 학생들의 손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내실이 탄탄하면 학생이 몰리는 게 당연한 일이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전문대학 일부에서는 “4년제 대학이 반대하는 것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여전히 ‘대학은 4년제, 전문대학은 2년제’라는 논리도 발목을 잡는다. 수업연한 규제를 풀 경우 4년제 대학이 학생모집에서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김정길 전문대교협회장은 “수업연한 자율화는 전문대학을 4년제 대학과 똑같이 대우해 달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고등교육기관 체제를 바로잡자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고등교육기관을 연구 중심과 취업교육 중심으로 나누고, 이런 바탕에서 자율적으로 경쟁하자는 의미다.

그렇지만 상황은 전문대학에 여전히 좋지 않다. 지난 7월에 발표된 ‘대학 자율화 2단계 1차 추진계획’에는 그동안 거론되던 수업연한 자율화가 아예 빠져 버렸다. 이래저래 전문대학의 갈 길은 멀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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