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전 교총 회장)

1972년 10월 유신, 지금 생각해도 섬뜩하다. 비록 48년 전 일이지만 결코 잊혀서는 안 될 이 땅의 참담한 역사적 사건이다. 실은 몇 년 전부터 그 흉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3선 금지 조항을 철폐하기 위한 개헌 파동이 1969년 여름에 이미 터져 나왔다. 

1972년 10월 17일 오후 7시, 결국 유신이 선포됐다. 일체의 집회와 시위가 금지됐고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10월 27일 공고된 헌법 개정안에 따르면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장충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선거를 대행한다 △국회의원의 3분의 1은 대통령이 추천한다 △대통령에게 긴급조치권을 부여해 현행 헌법의 효력을 중지시킬 수도 있다 △모든 법관 임명권과 국회해산권을 대통령에게 부여한다 △대통령의 임기는 6년으로 연장했다. 대통령의 종신 집권도 가능케 한 것이다. 유신이란 새롭게 개혁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는 유신이 아니라 개악이요, 민주정치의 포기일 뿐이었다. 

한국의 유신헌법, 제7차 개정헌법은 1972년 12월 27일부터 발효됐다. 대학 캠퍼스는 이에 저항하는 학생 측의 투석과 화염병, 경찰 측의 곤봉과 최루탄의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징발된 일부 유명학자와 어용학자들이 연일 TV에 나와 유신헌법의 정당성을 대변하는 모습은 참으로 가엾기도 하고 대학인의 울분을 자아내기도 했다. 

바로 유신 다음날인 10월 18일의 일이다. 두 가지 이유로 내 발등에 불이 떨어진 형국이 됐다. 첫째는 내가 학과장으로 있는 정외과 3학년 학생들이 기어이 경상북도 일원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오겠다는 고집을 부리기 때문이었다. 둘째는 TV 강제 출연을 위해 나를 찾아다니는 우리 대학 담당 기관원의 투망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일이었다.

첫 번째 일에 대해서는 학장과 상의한 끝에 학생들의 여행 출발을 제지키로 했다. 우리는 당일 새벽 용산 역전 지하다방에 자리를 잡은 다음 학생대표 조모군을 불렀다. 이처럼 험난한 시점에 집단으로 놀러 간다는 것은 동년배의 계엄군 병사들에게 정서적 반발을 유발시킬 가능성이 있거니와 사생결단 수준의 충돌 위험성도 상존하니 사회 환경이 풀릴 때까지 여행을 늦추라는 설득을 이어나갔다. 조군은 자기 단독으로 결심해 답변드릴 수 없는 사항이므로 클래스 회의를 우선적으로 열어야겠다고 주장했다. 그런 과정이 두 번 되풀이됐다. 결론은 뻔했다. 조군은 그 대신 “매일 밤과 아침 즉 하루 두 차례씩 상세하게 이상 유무 보고를 드리겠사오니 부디 안심하시고 보내 주십시오”하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조 군이 며칠간 취침 전과 기상 직후 자세하게 보고를 해줬다. 마치 내가 TV나 라디오 뉴스를 듣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기에 그의 보고는 우리를 안심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우리의 예감대로 졸업 후 방송기자가 됐다. 방송국에서 25년간 근무하면서 기자, 앵커, 국장을 거쳐 CEO까지 올라갔다. 세월이 흐른 후 TV 화면에서 그를 다시 보니 이번에는 놀랍게도 이름있는 대형교회의 목사가 돼 있었다. 

나를 유신 전도사로 TV에 출연시키고자 했던 관계기관의 투망에서 벗어나는 일에는 순간적으로 묘안이 떠올랐다. 우선 집이나 학과장실로 올지도 모를 모든 연락을 피해야 했다. 그 덕분에 나는 도리어 내 인생의 큰일을 하나 해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를 당시 전셋집 신세에서 벗어나 내 손으로 내 집을 짓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나의 오랜 친구 정이 자신의 전문가적 식견과 경험을 무기 삼아 나를 위해 희생적으로 나섰다. 나는 그 땅을 오가며 그 친구 덕분에 3개월 만에 내 집을 장만했다. 천만다행히도 그 시절엔 휴대전화라는 것이 없었다. 공사 현장의 전화는 일체 받지 않았다. 나는 석 달간 집에서 새벽에 나왔다가 밤늦게 돌아갔다. 

내가 그러고 있는 동안에 내가 존경하던 원로 교수님들과 동료 교수들이 다수 TV에 출연해 쓴 오이 씹는 모습을 하면서 마음에도 없는 유신찬양에 진땀을 흘렸다. 하지만 나는 집을 지으면서 명문사학의 학과장, 정치학자로서의 양심과 순결성을 지켜 낼 수 있었다. 나는 그 집에 24년간 살면서 대학의 처장, 학장과 대학원장, 교총 회장, 교육부 장관, 건국대 총장 등을 역임했다. 남들은 그 집을 복집이라 했다. 만약 10월 유신이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오늘날까지 전셋집 신세를 면치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위와 같은 숨 가쁘고 조심스러운 고비가 지나간 다음, 나는 학장님을 찾아뵙고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깊이 사과를 드렸다. 그리고 이상하게 생긴 나의 새집에 모셨다. 어머니께서는 나의 새집을 마치 라면상자 위에 사과 상자를 올려놓은 것 같다며 나무라셨다. 하지만 학장님은 즐겁게 노시다가 가셨다. 

가시면서 “윤 교수, 내가 오늘 풍성한 대접을 받고 가니 이 집의 옥호를 하나 지어줘도 될까?”하셨다. 나는 오직 감사할 뿐이라고 말씀드렸다. “10월 유신 파동 속 학교에도 안 나오고 숨어서 지었으니 유신옥으로 하세.” “학장님, 유신옥이라 하면 꼭 막걸리 대폿집 같으니 유신장으로 해주시죠?” 우린 실로 오랜만에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한바탕 목청 높여 웃어댔다.

이 나라의 정치사적 참변 10월 유신. 온 국민이 고통을 겪던 그 기간 중에 참으로 아이로니컬하게도 제자는 TV 방송기자의 길을 열었고, 나는 유신장의 주인이 됐다.

※ ‘살며 생각하며’는 대한민국 저명인사의 인생 스토리와 철학, 경험담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이번 ‘살며 생각하며’에는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전 교총 회장)이 함께 합니다.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와 미국 존스 홉킨스대에서 정치학 석사학위, 연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처장, 사회과학대학장, 행정대학원장 등 주요 보직을 역임했고 한국정치학회 회장,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건국대 총장, 호남대 총장, 교육부 장관 등을 지냈다. 현재는 연세대 명예교수와 단국대 석좌교수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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