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열 고려대 연구기획팀장

유신열 고려대 연구기획팀장
유신열 고려대 연구기획팀장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우리 헌법 제1조를 일부러 꼼꼼히 읽어보는 이는 거의 없다. 중요하지만 그 내용을 몰라도 일상 생활에는 큰 불편함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자주 보게 되는 것은 스마트폰 약정서, 매달 나오는 관리비 명세서, 도로의 자동차 속도 제한, 연구과제계획서 작성지침 등과 같은 것들이다. 깨알같이 적혀있는 내용에 따라 달마다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가고, 범칙금 액수가 정해지고, 신청한 연구과제의 당락이 결정된다.

국민의 일상에 민감한 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내용은 하위 규정을 자세히 살펴봐야만 알 수 있다. 그리고 하위 규정은 상위 규정보다 상대적으로 쉽게 개정할 수 있도록 권한이 위임돼 있고 어떤 경우는 담당자 한 사람의 손끝에서 쉽게 결정되기도 한다.

하위 규정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규정 체계에 따라 위로 연결돼 궁극적으로 ‘헌법’이라는 근원에 이른다. 연결 과정에는 하나의 원칙이 작용한다. “행정작용은 법률에 위반되어서는 아니 되며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의무를 부과하는 경우와 그 밖에 국민생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경우에는 법률에 근거하여야 한다”는 ‘행정기본법’ 제8조 ‘법치행정의 원칙’이다.

그런데 헌법이라는 담론에서 출발해 다양한 방향으로 갈라져 하위 규정인 각론에 이를 때까지 원칙이 잘 지켜질 수 있을까? 법 체계를 살펴보면 빈틈이 없어 보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규정은 글로 돼 있다. 글은 사람이 쓴다.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이 모두 달라 글이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많다. 따라서 규정이 한 단계씩 내려올 때마다 필연적으로 임의적 해석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좋은 철학과 담론에서 출발한 법이라도 몇 단계 내려가면 지원 취지가 통제 수단으로 변질이 된다. 약자의 삶을 오히려 위태롭게 하는 독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 하다. 악마는 하위규정의 디테일 속에 숨어 있다.

올해 1월 ‘국가연구개발혁신법’이 제정·발표됐다. 부처별 국가연구개발 규정을 통합·체계화 해 자율적이고 책임있는 연구개발환경을 조성한다는 목적이다.

얼마 뒤 국가연구과제에서 인건비 계상이 가능했던 대학 일부 연구자가 신규로 계약을 하는 과정에서 지원기관으로부터 인건비 계상을 하지 말라는 통보를 받았다. 급히 근거를 찾아보니 국가연구개발혁신법의 위임에 따라 제정된 ‘국가연구개발사업 연구개발비 사용 기준’이라는 행정규칙에 내용이 명시돼 있었다. 이 과정에서 혁신법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됐고 관계부처 홈페이지를 통해 애써 행정규칙을 찾아내게 됐다. 법령 위임을 통해 제정된 행정규칙의 경우 해당 위임법령의 의미를 밝히는 간접적인 논거로 활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법령에 없는 ‘인건비 계상 금지’ 내용이 행정규칙에 불쑥 들어왔고, 이 내용이 현실에 직접 영향을 미쳤다. 행정기본법 제8조 법치 행정의 원칙에 어긋나는 부분이다.

우리를 규제하는 법 체계는 너무 복잡하고 방대하게 얽혀있다. 미로 속에서 자칫하면 법의 취지는 방향을 잃는다. 법을 관리하는 누군가의 자의적 규제 의도가 쉽게 반영되기도 한다.

법치 행정의 원칙을 실현하기 위한 실질적인 제도 보완이 시급하다. 예를 들면 규제에 관한 사항은 규정을 만든 기관에서 반드시 규제 내용을 공개하고 행정기본법 제8조에 위배되지 않다는 점을 스스로 소명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제사항 공개 및 소명’을 의무화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햇빛이 없는 곳에는 곰팡이가 핀다. 누구나 규제 내용에 대해 명확하게 알 수 있도록 해서 규제의 그늘을 없애는 작은 혁신부터 시작해보자.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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