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전 교총 회장)

나는 중학교 시절 즉 해방 직후부터 이 나라의 사회적인 부조리와 마카오 모리배의 부패상을 척결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 때문에 반드시 판검사나 변호사가 돼야겠다고 몇 번씩이나 다짐했다. 3학년 때(당시는 중학교가 6년제였다)는 그런 제목으로 웅변대회에 나가 전교생 앞에서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친 일도 있었다. 그로부터 50여 년 세월을 더 살다 보니까 내가 대통령 직속 반부패 특별위원회 초대 위원장이 돼 있었다. 설립 기초작업만 하고 나왔다. 겪어보니 인생은 점이 아니고 선이더라.

중학교 5학년이 되자마자(당시는 6월이 신학년 초였다) 한국전쟁(6·25전쟁)이 터졌다. 나는 2년간 집을 떠나 산전수전을 겪었다. 국민방위군 생활을 포함해 고생을 실컷 맛봤다. 급성 맹장염으로 길에 쓰러져있는 나를 누군가가 이태리 야전병원에 데려가 겨우 살렸다. 그러나 나는 그가 누군지 아직도 모른다. 그 끝에 난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도 우리 가족의 피난지였던 대전에 피난민 고등학교(대전종합고등학교)가 뒤늦게 생겨났다. 나는 고3 편입을 지원했다.

그러나 학교 측(교감 김현명)은 원칙대로 나의 고2로의 편입만을 허용하겠다 했고 나는 고3으로 넣어주지 않으면 차라리 학교를 안 다니고 독학을 하겠다고 고집했다. 결국 늙으신 아버지께서 젊은 교감 앞에 머리를 숙이고 각서를 쓰셨다. 편입 후 아들의 1학기 말 성적이 평균 80점 미만이면 고2로 내려가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때의 내 심정은 유급의 위협이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엎드려 각서를 쓰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너무나 죄송하고 가엾고 분하기까지 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첫 학기에 평균 94점으로 남녀 합쳐 116명 중 수석을 차지했다. 어머니께서는 그때 내게 독종이란 별명을 애칭으로 부치셨다 한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내가 어찌 학업 이외에 다른 곁눈질을 할 수 있었겠는가. 피곤과 졸음에 못 견딜 때는 촛불(그땐 자주 정전사고가 있었다)에 눈썹을 태운 일도 더러 있었다. 눈썹 타는 그 특이한 냄새를 지금은 웃으면서 재음미한다.

전쟁 말기 내가 했던 피난민 고등학교의 졸업식 답사에는 이런 구절이 들어있다.

“햇볕이 나면 양지를 찾고 바람이 불면 바라크로 쫓기어가며 수업을 받던 우리들 … (생략) … 저희 졸업생 116명은 오늘부터 낯선 전선으로 총검을 잡고, 혹은 진리의 상아탑으로 펜을 들고, 그렇지 않으면 조국 재건의 생산터로 함마(해머)를 쥐고 … ” (1953.2.26.)

불과 서너 시간 거리에 있는 피의능선, 백마고지 등 최전방에서 적의 총탄에 쓰러져가는 우리 또래 친구들의 참상을 생각하면 고등학교를 이렇게라도 졸업하고 크고 넓은 꿈을 안고 대학에 진학한다는 것이 도리어 사치스럽고 죄스러울 뿐이었다.

후일 검사가 돼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파사현정 하겠다는 꿈도, 변호사가 돼 농촌에 살면서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막아주겠다는 꿈도 고3 편입 후부터는 당분간 마음속 금고 속에 깊숙이 보관키로 했다. 학교에서 수업이 끝나면 나는 산속으로 들어갔다. 해가 완전히 서산에 지고 책을 읽을 수 없을 때까지 산속에 머물렀다. 아! 지금 생각하니 그게 바로 나의 운명의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멀리서 유창한 영어연설 소리가 들려오지 않겠는가. 나무꾼이 황금새를 따라가듯 나도 영어연설에 이끌리어 산속 깊숙이 끌려들어 갔다. 베이지색 정장 차림의 훤칠한 젊은이가 푸른 숲속 송림 옆의 큰 바위 위에 올라서 있지 않은가. 나는 소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숨을 죽였다. 황홀경에 빠졌다. 드디어 그가 눈치를 채고 소나무 뒤의 나를 불러냈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욱 준수한 청년 신사였다.

그는 나에게 인생의 꿈을 물었다. 이실직고했다. 그의 반응은 싸늘했다.

“이 친구야, 꿈을 더 크게 품어라. 세계는 넓다. 그 속에 우리가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할 일이 너무 많다. 우리는 지금 나라를 반 이상 적에게 빼앗긴 상태다. 그런데 너는 지금 겨우 파사현정(破邪顯正), 농민 보호 등의 한가한 소리를 너의 삶의 목표로 삼고 있다는 건가. 삼천만의 운명은 어찌하라는 건가?”

나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했다. 그는 자기가 모 대학교의 정치외교학과 재학생이라고 했다. 그 청년이 내게 준 충격이 너무나 컸고 나의 좁은 시야와 소영웅주의가 너무나 부끄러웠다.

결국 그 청년이 주장한 대로 방향을 바꿨다. 그렇게도 확고하고 소중했던 소년의 꿈이 이렇게도 속절없이 무너질 수 있는 것인가.

대학 입학 후 나는 그 선배를 여러모로 찾아다녔으나 번번이 헛일이었다. 휴학 중인가? 군에 입대했나? 3학년 때 내가 우리 대학의 학생회장이 돼 대 동문 활동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쪽에서 먼저 나를 알아보게 돼 있었건만 아무 소식도 없었다. 나는 학교 주변 이곳저곳의 하숙촌까지 뒤졌다.

70년 전 일이지만 마음으로는 지금도 찾고 있다. 도대체 내 인생을 산속에서 한순간에 바꿔놓은 그 청년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가 다니고 있다는 대학은 분명히 부산에 있는데 재학생이 어째서 주중에 서대전의 뒷산에 와서, 더구나 전쟁 중에 정장하고 영어연설을 하고 있었을까? 이게 우연인가, 필연인가. 혹시 내가 환상을 보았던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였나? 참으로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1953년에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나는 과외는 물론 입시학원 근처에도 가 본 일이 없다. 얼마나 입시정보가 없었느냐 하면 정외과라는 학과가 있는 줄도 몰랐다. 입시지도란 말은 들어본 일도 없었다. 설혹 그 산속의 청년을 다시 만나도 이젠 서로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나 혼자 가슴속에 고마움을 느끼며 그에 대한 환상적 영상을 신비감으로 바꿔 가슴에 묻어둘 뿐이다.

※ ‘살며 생각하며’는 대한민국 저명인사의 인생 스토리와 철학, 경험담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이번 ‘살며 생각하며’에는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전 교총 회장)이 함께 합니다.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와 미국 존스 홉킨스대에서 정치학 석사학위, 연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처장, 사회과학대학장, 행정대학원장 등 주요 보직을 맡았다. 한국정치학회 회장,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건국대 총장, 호남대 총장, 교육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연세대 명예교수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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