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여 가천대 총장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Steve Jobs)에게도 초라한 과거가 있다. 입양아로서 양부모 밑에서 자란 그는 학비 때문에 대학을 중퇴하고, 친구의 기숙사 방바닥에 뒹굴고 자며, 빈 콜라병을 수집해 5센트씩 모아서 끼니를 때우곤 했다. 18살의 ‘노숙자’ 신세였다.

그래도 배우고 싶은 열망은 넘쳐서, 다녔던 대학에서 캘리그래피(영어 서체) 강의를 몰래 들었다. 등록금을 내지 않았으니 도강(盜講)이었다. 이때 도강으로 얻은 지식과 영감(靈感)으로 잡스는 훗날 PC의 서체를 개발하는데 그것이 우리가 PC에서 매일 마주하는 알파벳 글꼴이다. 우연히 훔친 지식으로 글로벌 스탠더드를 창조했다고나 할까.

그 허기진 시절, 잡스는 주말 저녁을 기다리곤 했다. 기숙사에서 11㎞ 떨어진 수도원에서, 일요일 저녁마다 무료급식을 주기 때문이다. 그걸 얻어먹기 위해, 가고 오던 길이 그토록 행복했다고 한다. 공짜 밥을 찾아 밤길을 걷는 빈털터리 청춘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릿해 온다. 그 애잔했던 청년이 자라서 세계를 주름잡는 애플을 일으켜 세웠다.

이러한 회고는 잡스가 마이크를 잡고 한 말이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지만, 애플로 크게 성공해, 세계적인 명문 스탠퍼드대학의 졸업식 연설자로 초청됐다. 2005년 그 졸업식에서 잡스가 했던 연설은 지금 당장이라도 네이버에 읽을 수 있다. 저 유명한 ‘Stay hungry! Stay foolish!(늘 갈망하라, 바보처럼 비우라’라는 잡스의 ‘유언’도 거기에 있다.

나도 잡스만큼의 ‘수렁’은 아니었지만, 가슴이 먹먹해지는 쓰라린 추억이 있다. 어머니께서 등록금 때문에 마음고생이 많았기 때문이다. 학비를 연초에 한 번 9월 초에 한 번씩 냈는데, 봄학기는 지난해 수확한 쌀을 팔아서 댈 수 있었다. 그런데 가을학기가 해마다 문제였다. 아직 추수는 멀었고 학비는 내야 하니까 매년 9월이 되면 쩔쩔맸다.

돈이 없으니 등록 마감일인 9월 1일을 해마다 넘겼다. 그때부터 등록금을 낼 때까지 어머니에게는 피 말리는 시간이 된다. 나는 어머니에게 송구스러워 내색을 안 하다가도 9월 15일쯤 되면 어쩔 수 없이 그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다.

납부기일을 넘기고 듣는 강의는 잡스처럼 도강이 된다. 스스로 청강생처럼 느껴지고, 죄인 아닌 죄인이 된 것 같아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시골 출신이라는 자격지심도 있는 터에, 가정 형편을 비교당하는 것도 너무 싫었다.

어머니는 결단을 내리신다. 들판의 벼는 아직 익지 않았지만, 이 무른 벼를 훑어서 상품화할 수는 있다. 벼가 익어 단단하게 되어야 도정(搗精)을 하지만, 뜨물을 품고 있는 이른 벼는 찧을 수 없기에 먼저 솥에 넣어 삶는다. 그것을 다시 말려서 방아 찧는 것이다. 고향에서는 이것을 ‘오리쌀’이라고 불렀다.

고소한 맛이어서 상품으로 팔리고, 이른 추석이 왔을 때 이 오리쌀로 차례를 지내기도 한다. 이 햅쌀은 제 수확량의 30% 정도를, 날려버려야 하는 문제가 있다. 그 상실분을 감내하시고 오직 딸을 의사로 만들기 위한 농부의 간절한 소망! 지금 생각해도 가슴 저민다. 나는 그 어머니의 기원과 속으로 흘린 눈물이, 대학교 총장인 딸을 키웠다고 생각한다.

글로벌 재벌이 된 재일교포 손정의(孫正義)도 지번(地番) 없는 집에서 자랐다. 그의 이력에 무번지(無番地) 거주라고 적혀있다. 할아버지가 한국에서 밀항으로 일본에 건너갔기 때문에, 가족은 철도 옆 빈 땅에 얼기설기 불법 주택을 지어서 살며, 돼지를 키워 팔면서 생계를 이었다. 냄새나고 천한 일이라 재일교포에게는 그런 허드렛일이 가능했다.

성공한 손정의는 나중에 회고했다. ‘어린 시절, 양돈 집의 우리 할머니가 끄는 리어카, 지독하게 냄새나는 음식물쓰레기 잔반을 싣고 다니는 손수레에 타고 놀곤 했다. 그때 할머니가 빈 손수레를 태워 주곤 했는데, 거기서 느끼던 미끌미끌한 감촉이 지금도 내 손바닥에 생생하다.’ 그런 비참한 시절을 보낸 어린이는 2020년 코로나 재앙에도 불구하고, 그 한해에만 52조 원대의 이익을 낸 글로벌 기업인으로 성장해 있다.

사람마다 초라하고 비루한 시절을 겪기 마련이다. 조부모 친부모를 포함하여 가족의 흙수저 시절이 있고, 심지어 무(無)수저였던 사람도 있다. 그러한 나락의 시절은, 견디고 극복해 내기에 달려 있다. 흙수저와 눈물 젖은 빵을 에너지로 삼는 사람만이 우뚝 선다. 맞바람에 무너지지 않고, 그런 바람에 더욱 맞서서, 생의 바람개비를 더욱 힘차게 돌린 사람들이 승자가 된다. 그 고통과 시련의 시절은 축복의 샘터가 된다. 눈물 젖은 빵을 삼키면서 이룬 성공은, 극적인 역전승처럼 더욱 찬란하고 값진 것이다.

※ ‘살며 생각하며’는 대한민국 저명인사의 인생 스토리와 철학, 경험담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이번 ‘살며 생각하며’에는 이길여 가천대 총장이 함께 합니다.

■이길여 가천대 총장은…
서울대 의대를 졸업했다. 일본 니혼대(日本大学)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명예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여자의사회 회장,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이사장, 국립대학법인 서울대 초대 이사, 헌법재판소 자문위원,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여성부의장, 서울대 의대 동창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가천대 총장, 사회복지법인 새생명찾아주기운동본부 이사장, 가천길재단 회장, 의료법인 길의료재단 설립자·명예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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