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희 춘해보건대 간호학과 교수
일반대학→전문대학 ‘턴’… 다양한 해외봉사 프로그램 많아서
학생과 함께 떠난 필리핀 ‘해외봉사’ 가장 기억나는 경험
개발도상국에 조금이나마 도움 기여할 수 있는 사람 되고파

김창희 춘해보건대 간호학과 교수.(사진=이중삼 기자)
김창희 춘해보건대 간호학과 교수.(사진=이중삼 기자)

[한국대학신문 이중삼 기자] “나에게 ‘해외봉사’는 남은 교수 생활의 ‘미션’이라고 생각한다.”

김창희 춘해보건대 간호학과 교수는 ‘해외봉사’에 대한 남다른 철학으로 ‘국제개발협력’에 이바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인물이다. 김 교수는 앞으로 퇴직까지 남은 ‘8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어떤 형태로든지 간호·보건 관련 해외봉사를 통해 개발도상국과 왕래하는 사업을 펼치고 싶다고 고백했다. 그는 “어디선가 국제개발협력이라는 얘기가 나오면 항상 생각하는 것이 있다. 과거 외국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대학이나 병원을 세우고자 한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면서 “제가 졸업한 연세대도 외국 선교사가 들어와 대학을 설립할 당시만 해도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손에 꼽히는 대학으로 성장했다. 현재 대학 선배들이 몽골이나 페루 등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이유가 이런 뜻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교수를 그만두는 날까지 ‘해외봉사’를 실천하고 싶다는 그를 16일 춘해보건대에서 만났다. 김 교수는 현재 한국재활간호학회 교육연구이사를 맡고 있으며 교내 생명윤리위원회(IRB) 위원장을 역임하고 있다. 춘해보건대에서 국제개발협력을 위해 다양한 시도를 진행하고 있는 그의 최종 목표는 개발도상국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필리핀 해외봉사 경험… 가장 기억 남아 =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해외봉사로 ‘필리핀’을 꼽았다. 그는 2019년 간호학과 학생들과 함께 필리핀 나가(NAGA)시 GOA지역에 방문해 해외봉사를 했다. 국제개발협력 이해증진사업 중 국외현장실습의 일환으로 진행된 해외 봉사활동이었고 필리핀 현지 교사와 학생들을 대상으로 심폐소생술 교육과 문화이해 활동을 펼쳤다. 그는 필리핀 내 GOA라는 지역에 방문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필리핀에 GOA라는 지역에 갔다. 정말 정글 속에 초등학교가 있었는데 교실은 야외에 있었고 나무 칸막이 몇 개가 쳐져 있는 것이 전부였다”며 “제가 느낀 것은 우리나라의 경우 고혈압이나 당뇨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할 수 있지만 이곳 사람들은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보건 관련 교육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GOA지역 내 무의촌 지역인 ‘Tobgon, San Isidro’마을을 방문했을 때 어린이들 대상으로 혈압, 혈당 측정, 상처관리와 보건교육을 실시했다”며 “한국국제협력단(KOICA)지원금으로 준비한 구급함과 춘해보건대 교직원 등이 기증한 의류, 신발, 상비약 등의 기증품도 전달했다”고 덧붙였다. 무의촌은 의사가 없거나 의료기관의 시설이 없는 의료취약지역을 말한다. 

그는 여전히 보건과 관련된 인식이 부족한 개발도상국이 많다며 코로나19가 해결되면 국제개발협력 일환으로 할 수 있는 선에서 개발도상국과 왕래하는 사업을 펼치고 싶다고 했다. 그는 필리핀 해외봉사를 통해 학생들도 많은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김 교수는 “해외봉사에 참가한 한 학생이 ‘해외봉사 경험으로 국제개발협력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짧은 기간 동안 이뤄진 봉사활동이었지만 큰 보람을 느꼈다’고 소감을 들었을때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고 전했다. 참고로 춘해보건대는 학생들의 글로벌 역량 강화시키고자 대학 내 글로벌센터에서 15개 이상의 다양한 해외 역량강화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해외봉사를 기획했지만 테러와 코로나19로 무기한 연장된 스리랑카 봉사에 대해서는 큰 아쉬움을 표했다. 그는 “2019년 1월 스리랑카에 직접 방문해 페러데냐 대학교와 국제개발협력에 대한 MOU 약정을 체결했다. 내용은 스리랑카 칸디지역의 페레데냐를 중심으로 여성건강센터 플랫폼을 구축하는 것이었다”면서 “하지만 당시 스리랑카에 테러가 발생해 외교부에서 출입제한국가로 지정하면서 할 수 없이 필리핀으로 봉사활동을 가게 됐다”고 설명했다. 

특히 ‘여성건강’에 초점을 맞춘 이유에 대해서는 ‘모자보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스리랑카는 ‘모자보건’이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나라다. OECD가 발간한 ‘Health at a Glance : Asia/Pacific 2018’에 따르면 스리랑카의 모성 및 아동사망률은 인근 국가보다 낮기는 하지만 신생아 사망률이 영아사망의 약 80%를 차지한다. 영아와 모성사망비가 지역 간에 상당한 격차를 보이고 있다”며 “이에 따라 스리랑카를 대상국가로 정하게 됐다. 여성의 건강, 산모의 건강, 나아가 아동의 건강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영양실조는 물론 아이들은 건강하게 자랄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모자보건’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코로나19가 빠른 시일 내에 종식돼 하루라도 빨리 해외봉사에 나서고 싶다고 희망했다. 

■간호사→간호학과 교수로, 일반대학→전문대학으로 = 김창희 교수는 처음부터 ‘간호사’가 돼야겠다는 목표는 없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간호학과에 진학해 공부하면서 관심이 생겼다. 김 교수는 “대학 입학 전까지 간호사가 정확히 어떤 직업인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가 연세대 간호학과 지원서를 냈다는 것을 알고 무작정 같은 학교 같은 과로 진학하게 됐다”며 “간호사라는 직업이 적성에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한 때는 대학교 3학년 때다. 당시 임상실습을 신경외과 병동으로 나갔는데 야간에 할머니, 할아버지 등 병원에서 제대로 씻지 못하는 어르신들의 간호를 했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간호사가 돼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평생을 간호사로 일해 온 베테랑이다. 1987년 연세대 간호학과를 졸업한 후 세브란스병원에서 신경외과 간호사로 일을 시작했다. 1994년 아주대학교병원으로 직장을 옮기고 11년간 간호과장으로 근무했다. 그는 당시 간호사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간호교육이 제대로 이뤄져야 환자를 잘 돌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던 중에 간호사 경력을 잠시 멈추는 계기가 발생했다. 바로 ‘아이’ 때문이었다. 그는 “간호사로 일할 당시 아침에 이웃에게 아이를 맡기고 출근을 했다. 당시 수간호사로 일하면 오후 4시 30분에 퇴근할 수 있었지만 그때도 해보고 싶은 일이 많아 새로운 일들을 만들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아이에게 소홀해지는 나를 발견했다”면서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에 올라갈 때 학습능력이 조금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 남편과 상의 후 사표를 냈고 육아에 전념했다”고 고백했다. 

3년간 육아에 전념하던 그는 ‘교수’라는 직업에 도전했다. 간호사교육에 대한 관심에서 학생교육으로 관심이 넘어갔다. 그는 “처음에는 간호부장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교수는 차선책으로 생각했었다”며 “하지만 간호사교육처럼 학생교육에도 관심이 많아지면서 교수가 되기를 결심했다. 이에 2008년부터 13년간 교수로 일해오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춘해보건대에 온 지는 4년이 됐다면서 전문대학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저는 일반대학과 전문대학에서 간호학과 교수로 일한 경험이 있다. 전문대인 혜전대, 일반대인 영동대(현 유원대) 그리고 일반대인 건양대를 거쳐 춘해보건대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며 “제가 전문대를 선택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바로 ‘다양성’과 ‘부모님’ 때문이다. 아이들이 성장하고 나니 연로한 부모님이 눈에 밟혔다. 1년에 세 번 보기도 힘들었다. 이에 부모님과 가까운 곳에 직장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전문대를 선택한 이유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시도할 수 있는 여건이 일반대보다 컸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춘해보건대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부모님이 사는 지역 가운데 춘해보건대의 역사, 다양성, 실적 등이 좋았다고 판단했기에 지원을 하게 됐다고 한다. 끝으로 그는 “춘해보건대에서 교수를 그만 두는 날까지 국제개발협력에 최선을 다 하고 싶다”며 강한 포부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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