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전 교총 회장)

불과 몇 달 전의 일이다. 누군가가 매우 희한하고 감동적인 영상물을 보내왔다. 빠바바바아아, 매우 귀에 익숙한 교향곡 연주가 흘러나왔다. 베토벤의 심포니 5번 ‘운명’이다.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제자 안톤 신틀러에게 이 곡을 들려주면서 “운명은 이와 같이 문을 두드린다”고 말했다. ‘운명 교향곡’이란 별칭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 곡을 무려 4년에 걸쳐 작곡했다는데 그 직전부터 난청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러니 독신의 고독에 더해 청각 장애인이 거둔 “고난 후의 승리”라 할만하다. 그것이 그의 운명교향곡에 잘 녹아있는 것 같다.

그 영상물은 한 젊은이가 오토바이를 타고 이미 운명의 여신이 만들어 놓은 길을 달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길은 한 없이 솟아올랐다가 갑자기 한없는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기도 한다. 길은 끊겼다가 이어지기를 수없이 되풀이한다. 갑자기 두 갈래 세 갈래 길로 갈라졌다가 하나로 모아지기도 하며 도중에 누군가를 만나 동행했다가 곧 헤어지기도 한다. 보면 볼수록 베토벤의 인생을 그려낸 것 같기만 하다. 우리네 인생도 거기서 예외가 될 수 없다. 

분명코 그 젊은이는 시종여일하게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 모든 고난을 뛰어넘고 건너뛰면서 죽음과 부활의 반복 끝에 힘차게 뛰어 들어오면서 최후의 승리를 거머쥔다. 당대의 명지휘자 푸르트뱅글러(Furtwaengler)는 얼마나 이 ‘운명’에 매료되었기에 240여회나 이 곡의 연주를 지휘했겠는가.

돌이켜보니 나의 자유의지에만 의존했던 오만의 세월이 있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나의 자부심이라 할 자유의지마저도 운명이 허락한 틈새였을 뿐이었다. 평생 예상치도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던 K대와 H대, 두 대학교에서 총장직을 수행하면서 나는 여러 차례 그 같은 내적 성찰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K대의 경우를 보자. 내가 대학원생 시절부터 존경해왔던 교수님이 어느날 국무총리를 거쳐 K대학의 이사장으로 취임하시더니 나를 그 대학의 총장으로 청빙하셨다. 나는 일언지하에 사양했다. 그 대학에는 내가 알기에도 명망과 능력을 갖춘 교수님이 여러분 계실 뿐만 아니라 그분들을 정점에 모신 두 개의 인의 산맥이 공석중인 총장직을 놓고 심각한 대결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내부적 결속력과 외부적 저항력이 유난히 강한 문화적 전통을 지닌 대학임을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대학이었다. 그러므로 나 같은 범부가 함부로 그 대학의 총장직을 넘본다는 것은 그 대학의 구성원들에게 심히 결례가 될 뿐만 아니라 이사장께서 기대하시는 성과를 보장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그 제안을 과분하다고 사양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나는 1998년 가을 4년간의 임기를 행복하고 보람있게 마치고 약속대로 만 65세로 정년퇴직의 영광을 누렸다. 나는 베토벤 ‘운명’의 제1악장처럼 과감하고 박진감있게 시작해서 부드러운 여운을 남기며 임기를 마무리 했다고 자부한다. 지금도 그 세월이 내 평생의 자부심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K대학 총장이 된 것이 오로지 나의 자유의지였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 

2000년 봄 대통령직속 반부패위원장직을 사퇴하고 실로 오랜만에 노년의 한적한 은퇴생활을 즐기고 있던때였다. 그날도 저녁 늦게까지 내 오피스텔에서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희미하게 나마 “똑똑·똑똑”하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베토벤은 절친한 친구의 이 노크 소리에서 ‘운명’ 작곡의 악상을 얻었다고 했지만 나는 세속적인 경계심으로 귀를 기울였다. 여염집 할머니였다. 의아해졌다. 생면부지이기 때문이다. 정중히 맞아 드렸다. 차를 대접하면서 용건을 물었다. 알고 보니 그 할머니는 전남 광주 H대학의 설립자였다. 이사장은 남편인 P씨가 맡고 있었다. 자기 대학의 총장으로 모시겠다는 것이었다. 

나를 어떻게 알았으며 왜 하필 그 대학 총장이 나여야 하느냐고 물었다. 거기도 6년전의 K대학 처럼 총장자리가 현재 공석이었다. 바로 취임해달라는 독촉이 심했다. 나는 이번에도 그분이 원하는 대답을 줄 수가 없었다. 전혀 생각해 본 일도 없었거니와 내가 그 대학의 총장으로서 적합한가, 내가 총장으로서 무엇을,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는지 가늠조차 안 되는데 어떻게 그 자리를 받아 들이겠는가. 그녀는 오늘 광주에서 올라왔는데 돌아가는 차표도 끊었으므로 빨리 확답을 듣고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는 이미 거부했으나 예의상 “당장 확답을 줄 수 없으니 1주일의 여유를 달라”고 설득했다.  

그런지 채 사흘이 지나가기도 전에 다시 설립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즉시 확답을 달라는 독촉이었다. 그 사유를 물어본즉 결국은 정치권에서 누군가를 총장으로 밀고 있으니 나를 내세워 그를 막아보겠다는 속셈이었다. 교육계 특히 대학이 정치권의 압력에 총장 인선마저 좌우된다면 내가 어찌 이를 좌시할 수 있겠는가. 바로 그것이 충격적인 동기가 돼 나는 즉석에서 총장취임을 승낙하고 그 주말에 그 대학의 설립자의 요구대로 급하게 내려가 생각지도 않았던 H대학의 총장이 됐다. 

고대 희랍의 신화에서 보면 운명의 여신 모이라이(Moirai) 세 자매가 실을 관리하면서 인간의 출생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 그리고 죽음의 세 단계를 각각 분담하고 있다. 나도 그렇게 운명의 여신에게 관리당하고 있는 것인가? 기독교에서는 이를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보고 있다.

인간이 어떤 가문의 어떤 부모 밑에서 어떤 DNA를 받고 태어나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선택사항이 아니다. 자유의지와 무관하다. 또한 언제, 어떤 원인으로, 어떤 형태로 죽느냐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결코 내 마음대로가 아니다. 다만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여러 틈새들, 즉 중간단계에서만 겨우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이 운명의 여신과 그 결정권을 다툴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인생 아닌가?


※ ‘살며 생각하며’는 대한민국 저명인사의 인생 스토리와 철학, 경험담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이번 ‘살며 생각하며’에는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전 교총 회장)이 함께 합니다.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와 미국 존스 홉킨스대에서 정치학 석사학위, 연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처장, 사회과학대학장, 행정대학원장 등 주요 보직을 맡았다. 한국정치학회 회장,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건국대 총장, 호남대 총장, 교육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연세대 명예교수와 학교법인 홍신학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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