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전 교총 회장)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나는 부모님께 꾸중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아버지는 내가 스물세살이던 1956년에 61세의 연세로 어머니는 내가 마흔한살이었던 1974년에 향년 81세로 세상을 뜨셨으나 내가 그처럼 장성했을 때까지도 꾸중을 들은 기억이 없다. 뿐만 아니라 초·중·고·대학에 이르는 16년간에도 대학 졸업 직전의 단 한 번을 빼놓고는 어느 선생님이나 교수님으로부터도 언짢은 말씀조차 들어본 기억이 없다. 이게 사실일 수 있는가?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살아오는 동안 내게 고맙게 해주신 분들은 어쩐 일인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새롭게 기억에 떠오른다.

특히 대학 졸업 후 첫발을 내딛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신 교수님이 계시다. 당시에 Y대 교무처장을 맡고 계셨던 정외과 조효원 교수님이시다. 평소에 나를 과분하리만치 좋게 보셨던 것 같다. 어느 날 육사에 강의하러 가셨다가 교수부 정치학과 주임 교수를 만나 나를 교관으로 추천하셨다면서 며칠 후 인터뷰하러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조 교수님께서 자신의 초록색 짚차를 손수 운전하시면서 나를 포장도 안 된 2시간 거리의 육사까지 데리고 가셨다. 얼마나 놀랍고 감동적인 제자 사랑인가. 나도 두 대학의 총장직까지 포함한다면 1957년 육사 교관직을 시작으로 근 40년간 교직 생활을 해봤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었던 제자 사랑이었다. 인터뷰를 무난히 끝냈다. 총장추천서만 제출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당시 백낙준 총장님께서는 미국 출장 중이셨다. 부총장 최현배 교수님께서 그 직무를 대행하셨다. 최현배 부총장님은 국문과 교수님이셨기에 나는 그분에게 한 시간도 배운 일이 없다. 그러므로 사적으로는 일면식도 없다고 하겠으나 어쩌면 그 어른으로서는 나를 기억하실 수도 있는 사건이 있기는 있었다.

1955년 9월,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승만의 자유당 독재와 장기 집권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이 격심하던 때였다. 때마침 민주국민당은 민주당으로 확대 개편하면서 대표최고위원으로 해공 신익희 선생을 선임했다. 바로 그때 나는 우리 대학인 Y대 정법대학 학생 간부들 수 명과 함께 서울 종로2가 YMCA 근처에 있는 민주당 최고위원실을 찾아가 해공을 만났다. “해공 선생님, 민주당의 발족은 나라의 민주 발전에 대단히 중요한 시대적 의미가 있으니 대표 최고위원께서 직접 저희 대학에 오셔서 민주당 확대 개편의 목적과 사명, 진로와 정책을 밝혀주십시오” 단도직입적인 당돌한 섭외 활동이었다. 해공은 유석 조병옥을 비롯한 다른 최고위원들과 몇 마디 주고받더니 즉석에서 수락하고 약속 일자를 잡아줬다.
 
노천극장을 가득 메운 수천명의 전교생과 타교생들 앞에서 개회 연설은 내가 했지만 제1야당 공식대표의 내교에 대한 학교측의 돌발적인 공식 환영 연설은 총장 직무대행이셨던 외솔께서 하실 수밖에 없었으니 얼마나 당황스럽고 난처하셨겠는가.

나와 외솔 최현배 선생님과는 그런 인연이 1년 수개월 전에 딱 한 번 있었을 뿐이었으므로 나를 아직까지 기억하실 리가 없었다. 추천서를 받기 위해서 찾아뵙기로 약속된 날 아침 9시를 바라보며 일찌감치 성북동 집을 나섰다. 그 당시의 교통 사정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신촌역에 도착하니 이미 9시였다. 100m 경주하듯 뛰었다. 그래도 10여분 지각이었다. 몸에선 초겨울인데도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었다.
 
부총장실에 뛰어드는 나를 보시자마자 그 어른께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시더니 나를 세워놓은 채 “윤 군, 돌아가게! 자네 같은 사람의 추천서는 못 써주겠네. 친구들 사이에도 약속은 엄수해야 하는 법인데 스승과의 약속을 10여분씩이나 어기는 자네에게 국군의 기간 장교 교육을 어떻게 맡기겠나?” 하시더니, “이 나라가 과거에 자네 같은 조상 때문에 일제 식민지가 되었다”하시며 이 나라의 망국 과정과 원인, 이 민족의 질병 같은 폐습과 민족 갱생의 원리와 방법을 설파하시는 것이 아닌가! 내 일생을 통해서 그렇게 감동받기는 거의 처음이었다. Y대학에 입학한 보람을 졸업 직전에 느끼는 순간이었다. 너무나 감격적이었다. 졸업이 내일모레인데 이제 와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으니 지난 4년이 아까웠다. 

왜 다른 교수님들은 나를 항상 칭찬만 해주셨나 원망스럽기까지 하였다. 눈물이 내 나이에 안 어울리게 펑펑 쏟아졌다. 일생 처음이며 마지막이다. “잘 알겠습니다. 부총장님, 평생 명심하며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하고 뛰쳐나왔다. 나의 인생 계획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음에도 그저 감사와 감동뿐이었다. 어디쯤 갔을까 멀리서 “윤 군!”하는 소리가 나기에 돌아다 보았다. 외솔 선생님이었다. 다시 오라는 손짓이었다. 방에 들어서니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책상 서랍을 여셨다. 이미 준비해 놓으신 추천서였다. “보아하니 자네가 크게 반성하는 것 같아 희망을 보았네. 이거 가져가게” 하시는 거였다.
 
그 덕분에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으로 육사 정치학 교관 5년반을 무사히 마쳤다. 이것이 내가 평생을 교육에 몸을 담는 출발점이 되었다. 나도 제자들을 향해서 외솔처럼 엄격하고 감동적으로 교육시켜야겠다고 몇 번씩 다짐했으나 도저히 그 어른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나를 울리신 그 고마움을 평생 잊을 수 없어 졸업 후 십여 년간 그 댁에 세배를 다녔다. 그러나 미국 유학 중이던 1970년 3월 23일 슬프게도 그 어른께서 영면하셨다는 비보를 접했다. 

외솔께서 나를 크게 꾸짖셨을 때, 어쩌면 뜨거운 열정으로 손수 쓰신 “조선민족 갱생의 도”(1930)와 집필 중이시던 “나라 사랑의 길”(1958)에서 보여주신 우국충정의 무거운 책무감이 그 어른의 가슴을 더욱 크게 짓눌렀던 것 같다. 

※ ‘살며 생각하며’는 대한민국 저명인사의 인생 스토리와 철학, 경험담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이번 ‘살며 생각하며’에는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전 교총 회장)이 함께 합니다.

■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와 미국 존스 홉킨스대에서 정치학 석사학위, 연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처장, 사회과학대학장, 행정대학원장 등 주요 보직을 맡았다. 한국정치학회 회장,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건국대 총장, 호남대 총장, 교육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연세대 명예교수와 학교법인 홍신학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한국대학신문>

저작권자 © 한국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