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전 교총 회장)

우리 내외가 애지중지하며 30여년째 간직하고 있는 액자가 하나 있다. 우리 시대의 한글 서예가로서 역대급 명필이라고 칭송받는 꽃뜰 이미경님의 작품 매화이다. 한글 서예가로서 쌍벽을 이루고 있는 갈물 이철경님과는 자매가 된다. 그 두 분은 모두 일제 강점기에 이화여전(지금의 이화여대)을 졸업하고 아버님 이만규 배화여고 교장의 발길을 따라 다년간 고교 교사로서 교육자의 삶을 살아가는 한편 한글사랑과 나라사랑의 불꽃을 한글 서예로 지펴나가기도 했다.

“아프게 겨울을 비집고/ 봄을 점화한 매화/ 동트는 아침 앞에/ 혼자서 피어있네/ 선구는 외로운 길/ 도리어 총명이 설워라.” 이는 꽃뜰이 써내려간 이호우 시조시인의 “매화”이다. 그는 28세이던 1940년 일제 강점기에 시조 「달밤」으로 등단했다. 아마도 그는 매화를 바라보면서 불운한 우리 민족의 선구자들을 떠올리며 애달픈 심정으로 통한의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매화는 하얗게 눈 덮인 겨울 끝자락에 피어나 홀로 외로움과 추위를 견디며 은은하게 매향을 풍긴다. 매화, 대나무, 소나무의 세한삼우(歲寒三友)의 으뜸도 매화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사군자(四君子)의 으뜸도 매화이다. 구양수, 소동파 등을 포함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분인 북송의 법개혁주의자 왕안석(王安石)의 “매화”를 보면 이호우의 매화가 더욱 특이함을 알 수 있다.

“담 모퉁이의 매화 몇 가지/ 추위를 이기고 홀로 피었네/ 멀리서도 눈이 아님을 알겠나니/ 은은한 향기 풍겨오누나” 왕안석의 매화는 이호우에 비하면 잔잔한 안정감과 평화가 있다. 주어진 현실에 대한 울분도 통한도 없다. 매화로 선구자를 암시하는 우국충정의 부담감도 없다. 

무엇보다도 나는 백설 위에 예쁘고 상큼하게 피어난 매화를 보면서 외롭고 서러운 그 시대 그 땅의 불운한 선구자들을 연상하며 괴로워하는 이호우 시인이 더욱 가엾고 존경스럽다.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의 민족 가곡, “선구자”를 보면 더욱 공감이 간다.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늙어 갔어도...하고 시작되는 이 노랫말은 절마다 후렴처럼 선구자들을 눈물로 추모하고 있다. 1절에선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2절에선 “이역하늘 바라보며 활을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그리고 3절에선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로 매듭짓고 있다. 누구도 눈물 없이는 이 노래를 끝까지 부를 수 없으리라. 이것이 매화꽃 속에 숨어있는 선구자의 영혼이다.

실은 나도 여러해 전 해란강을 끼고 펼쳐지는 해란벌을 달려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를 다녀오면서 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하고 읊어댔다. 용정시로 돌아오면서 왼편 하늘 밑에 솟아있는 산마루의 일송정을 올려다보며 사진 한 장 찍는 것으로 나의 거친 숨을 몰아쉬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일제시대 많은 선구자들을 배출한 용정중학을 한바퀴 둘러본 것도 그때의 일이다. 지금까지도 깊은 감동으로 남아있다. 특히 그 학교의 입구 계단옆에 걸려있는 백두산 천지 그림은 두만강변을 달렸을 선구자들의 영상과 함께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민족의 선구자들도 역사속을 뒤져보면 각인각색이다. 매화가 각양각색인 것과 같다. 나는 근년에 와서 세 점의 매화를 감상하는 행운을 가졌다. 하나는 동곡(東谷, 李彰文, 1932년생)의 것인데 나는 그와 아무런 인연이 없다. 대한민국 미술대전에 네 번 입선하였다는 그의 매화(1986년작)에서 나는 아름다움과 평화로움을 느끼기는 하였으나 불운하면서도 강인한 이 민족의 선구자 모습은 연상될 수가 없었다. 

난사 정영조(蘭史, 鄭榮朝)님의 매화도 동곡의 그것만큼 화려하고 아름답다. 그녀 역시 본인의 외양과 성품을 닮아 가장 선량하고 여성적인 매화를 그려냈다. 이 험한 세상에서 싸워 이겨내야 할 선구자를 매화로 형상화하기에는 그들이 그린 꽃잎의 색깔이 너무 화사하고 여성적이며 마치 나비 같아 외롭고 서러운 선구자의 모습이 좀처럼 묻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현곡 조덕행(玄谷 趙㥁行)님의 매화를 보면 남자중의 남자다운 작가의 성품을 닮았다. 그의 매화 꽃잎에는 고달프고 외로운 시대를 뚜벅뚜벅 걷다가 힘차게 뛰어 나가려는 선구자의 강력한 의지와 열정이 빨간 잎새와 강인한 나뭇줄기에서 묻어난다. 난사(蘭史)와 현곡(玄谷)은 모두 국전 입선 또는 초대 작가 이며 80대 후반의 동시대 문인화가 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려낸 매화가 모두 서로 다르듯이 그 속에 담긴 선구자의 영상과 염원도 결코 같을 수 없다. 

어떤 대학의 이사장께서는 일찍부터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를 인류의 정신적 지도자로 존경하는 나머지 그를 위한 기념관을 교내에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만델라는 남아공 최초의 흑인 운동가 출신이자 초대 흑인 대통령으로서 27년간의 감옥 생활을 용서와 화해로 극복한 사랑과 평화의 상징이다. 그야말로 참혹한 엄동설한 같은 정치적 지평을 뚫고 나온 매화요, 인류평화의 선구자라는 것이다. 

모든 매화가 같지 않듯이 선구자도 결코 같을 수 없다. 개척자형 선구자( Pioneer)가 있는가 하면 전조(前照)형 선구자(Forerunner)도 있고 전달형 선구자(Herald)도 있다. 매화로 그려낸다면 모양과 색깔과 표정이 저마다 다를 것이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미국 플리머스에 정착한 영국 청교도단(Pilgrim Fathers),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세종대왕, 다산 정약용 등을  매화로 그린다면 어떤 모습으로 표현해야 할 것인지?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 요구에 맞는 그림을 그려내기보다 차라리 해란강변에 말을 달리며 이국 하늘에 활을 쏘는 게 도리어 수월할 것 같다.

이 나라의 겨울은 언제까지일까? 얼마나 더 기다려야 이 땅에 흰 눈을 뚫고 매화가 피어오르려는가? 이때 우리의 매화는 우리 민족에게 어떤 모습의 선구자를 보여 주려는가? 전조형 선구자와 개척자형 선구자를 가슴 조이며 기다리는 이가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 ‘살며 생각하며’는 대한민국 저명인사의 인생 스토리와 철학, 경험담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이번 ‘살며 생각하며’에는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전 교총 회장)이 함께 합니다.

■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와 미국 존스 홉킨스대에서 정치학 석사학위, 연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처장, 사회과학대학장, 행정대학원장 등 주요 보직을 맡았다. 한국정치학회 회장,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건국대 총장, 호남대 총장, 교육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연세대 명예교수와 학교법인 홍신학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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