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애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박정애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일본군‘위안부’피해는 부정할 수 없는 전시 여성인권 침해 사례이다. 보편적인 인권문제로서의 ‘위안부’ 인식은 이 문제가 국제사회에 처음 제기된 1990년대 초부터 꾸준히 공유돼온 바다. 국제사회에서 ‘위안부’ 피해사실은 이미 입증이 끝난 문제이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군은 효율적인 전쟁수행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여성의 성을 이용했으며, 위안소로 동원된 피해자들은 ‘본인의 의사에 반한 피해’를 입었다. 동원 과정의 강제/자발의 여부는 이들이 성노예 피해자라는 사실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보편적인 여성인권 문제로서 ‘위안부’ 역사는 이러한 성동원, 성폭력 피해사례가 시공간을 가로질러 양태를 달리해 지속, 반복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위안부’ 피해 사례는 초국적 성폭력 문제 해결의 기준이 되고 있다. 캐롤 글럭은 ‘세계가 위안부에게 빚진 것’이라는 글에서 “위안부의 이야기는 동아시아 기억 정치의 초점이자 국제인권과 여성에 대한 성폭력 문제의 기준으로서 초국적 기억 경관의 세계적 피해자들로 자리매김했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이러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흔들려는 세력은 일본 우파를 중심으로 한 역사부정론자들이다. 이들은 조선인‘위안부’ 동원의 자발성/강제성 여부를 계속해서 쟁점으로 만들면서 ‘위안부’는 성노예도, 피해자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 일본군‘위안부’제도 시행자들이 그러했듯이 일본국가의 이익과 체면이다. 내셔널리즘을 옹호하기 위해 피해여성들을 침묵시키고 혐오한다. 그리고 학술영역에 조선인‘위안부’문제를 끌고 들어와 피해여부를 입증의 영역으로 만들려고 한다. 이들의 치밀한 전략에 따라 전개된 올해 초 ‘램지어 사태’는 이러한 공세의 하이라이트였다.

그러나 우리는 ‘램지어 사태’를 겪으면서 ‘위안부’문제가 글로벌 사회에서 이미 확고하게 자리잡은 보편적 인권문제라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따라서 역사부정론자들의 프레임에 휘말려 ‘위안부’피해를 입증하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시기와 지역 그리고 정치적 성격에 따라 양상을 달리하는 성폭력 피해 사례들을 더 많이 배우고 인식해야한다는 과제에 직면했다.

역사적 보편성은 그 특수성의 총합으로 구성된다. 양상과 성격을 달리하는 성동원, 성착취, 성폭력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전제돼야 ‘위안부’피해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위안부’ 역사 이해에서 젠더 관점과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관점은 식민주의이다. 그리고 이 피해 사례가 일본과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를 지낸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식민주의 관점에 대한 강조는 조선인 피해자에 국한된 한국 내셔널리즘의 발로로 비판되기도 하지만 식민주의는 식민지라는 정치경제적 환경에서 존재하는 여성들이 어떻게 공권력에 의해 동원되고 이송되고 배치되느냐의 문제와 연결된다. 예를 들어 조선에서 동원된 일본인 여성, 타이완에서 동원된 조선인과 일본인 여성, 아시아 현지의 친일정권에 의해 동원된 현지 여성의 피해를 설명하기 위해서 식민주의 관점이 필요하다. 또한 제국주의를 경유해온 서구사회 중 식민지나 점령지 여성에 대한 성폭력 문제에서 자유로운 나라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위안부’ 피해의 역사서술은 시공간의 특수한 성격에 따라 새롭게 쓰면서 보편적인 인권문제에 가까이 가야 한다. 이때 서로 교차하며 공권력과 연계되는 사회경제적 권력들-민족, 계급, 젠더 위계에 따른 다양한 권력주체들-의 의도에 따라 ‘위안부’ 피해 양상이 달라진다. 보편적인 인권문제를 말하기 위해 우리는 그 다양한 양상과 차이를 알아야만 한다.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논의는 교차하는 권력들의 권력행사 방식을 낱낱이 드러낼 때, ‘국익’을 위한다는 권력의 명분이 인권에 반하는 죽음의 정치를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공유할 때, 이 범죄에 우리들이 연루돼 있는 지점을 사유할 때,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이렇게 기억의 의미를 갱신하며 ‘위안부’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써나가는 가운데 각종 정치적 수사를 내세워 성을 도구화하는 권력들을 경계할 수 있다. 이로써 ‘본인의 의사에 반한 여성의 피해’를 반복해서 만들어내는 사회를 근절하겠다는 ‘위안부’ 문제 해결의 목표에 더 가까이 닿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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