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롯데 자이언츠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프랜차이즈 스타 투수
해설가 맡으면서 넓은 시각으로 야구를 바라볼 수 있게 돼
해설가 도전, 대학 교육자의 길을 선택한 사연 전격 공개
“선수의 길을 포기한 후배들에게 두 번째 기회 주고파”

염종석 동의과학대 야구부 감독 (사진=김한울 기자)
염종석 동의과학대 야구부 감독 (사진=김한울 기자)

[한국대학신문 김한울 기자] 1992년 우승을 차지한 롯데 자이언츠 선수들 가운데 유난히 키가 크고 금테 안경을 쓴 신인 투수가 있었다. 당시 최고 수준의 슬라이더를 던지던 그에게 사람들은 ‘염슬라’, ‘염라대왕’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그 주인공은 염종석이었다. 17시즌 동안 롯데 자이언츠에서만 뛰다가 은퇴한 염 씨는 현재 동의과학대 야구부의 초대 감독이 돼 팀을 이끌고 있다. 한국야구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린 스타선수가 학원 야구 지도자로 부임하는 일은 흔하지 않다. 그가 몸담았던 팀 ‘자이언츠’에 걸맞은 큰 키를 가진 염 감독의 이야기를 동의과학대 본관 대회의실에서 들어볼 수 있었다.

염종석 감독은 부산에서 나고 자란 부산 지역 프랜차이즈 투수 출신이다. 1992년에 데뷔하자마자 17승 9패 6세이브 2.33의 방어율을 기록하며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이는 롯데 자이언츠가 기록한 마지막 한국시리즈 우승이다. 데뷔와 동시에 전성기를 구가한 그는 사실 바로 프로에 데뷔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원래 대학에 가고자 했지만 넉넉하지 않은 가정 형편으로 바로 프로에 데뷔해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며 “처음에는 어떤 보직이든 상관없으니 1군에 계속 남아있겠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선수 생활 중 데뷔 첫 등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경기 시작 전 애국가를 제창하다가 긴장해서 하마터면 마운드에 주저 앉을 뻔했다고 웃음 지었다.

소속팀의 우승을 견인한 그는 그 해 가장 뛰어난 투수에게 수여하는 투수 부문 골든 글러브와 가장 뛰어난 신인에게 주는 신인왕을 동시에 석권했다. 방어율 1위는 덤이었다. 데뷔하자마자 부산 지역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성공적 데뷔 이후 그는 욕심을 내 두 번째 목표를 갖게 됐다. 그것은 투수 100승과 2000이닝 투구 그리고 탈삼진 1000개였다.

하지만 소속팀의 부진과 함께 어린 나이부터 많은 공을 던졌던 후유증이 찾아왔다. 그는 팀을 원망하지 않고 팔꿈치·어깨 통증을 참아가며 17시즌 동안 롯데 자이언츠에서 투수로 활동했다. 2000이닝 투구와 탈삼진 1000개는 달성할 수 있었지만 2008년 시즌이 끝난 후 100승까지 7승을 남긴 93승에서 소속팀의 계약 해지 통보가 날아들었다. 그는 “선수 생활 막바지에 들어서면서 매 시즌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담담하게 최선을 다했다”며 “하지만 막상 팀으로부터 마지막이란 소리를 들으니 허탈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100승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에 다른 팀으로의 이적을 추진했다. 당시 김인식 감독이 있었던 한화 이글스에서 구체적인 계약 조건을 제시받기도 했다. 그렇게 이적을 마음먹고 마지막으로 배재후 당시 롯데 단장과의 식사 약속을 잡았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식당에서 자신이 17년 동안 뛰었던 롯데 자이언츠의 사직야구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100승을 달성하기 위해 이적을 굳게 다짐했지만 사직야구장을 본 그는 다른 팀의 유니폼을 입고 고향 팀을 상대하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기 싫었다.

“사직야구장을 보니 이적하려는 마음이 흔들렸다. 부탁해도 안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배 단장에게 다시 한번 팀에서 뛸 수 없겠냐고 울면서 사정했다. 하지만 팀에 더 이상 내 자리는 없었다. 100승도 중요했지만 17년 동안 뛰었던 팀을 상대로 공을 던진다는 것은 상상이 되질 않았다. 결국 식사를 마치고 가족과의 상의 끝에 은퇴를 결정했다. 아쉬움도 있었지만 한 팀에서만 뛴 투수로 기억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은퇴 후 그는 선수로서 야구를 경험했던 때와는 다른 시각으로 야구를 보고자 했다. 투수 코치를 거쳐 해설가에도 도전하며 야구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선수와 코치 시절에는 내가 맡은 보직만 잘하면 된다는 마음가짐이 있었다. 하지만 해설가를 맡으면서 선수들의 유기적인 움직임을 지켜보며 넓은 시각으로 야구를 바라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동의과학대 야구부 단체 사진 (사진=동의과학대 제공)
동의과학대 야구부 단체 사진 (사진=동의과학대 제공)

해설가 활동을 했음에도 선수 코칭을 포기할 수 없었다. 선수 시절부터 야구 지도자라는 목표를 가졌던 만큼 그는 현장으로의 복귀를 원했다. 하지만 프로 코치가 아닌 대학 교육자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지금까지 수많은 학생들이 고등학교까지 선수 생활을 하다가 신인 드래프트에서 발탁되지 못해 선수의 길을 포기하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봤다. 그들에게 두번째 기회를 주고 싶었다.

야구계 선배로서 책임감을 느낀 그는 학생들에게 또다른 기회를 주고 싶다는 신념으로 부산방송(KNN)에서 알게 된 문근해 아나운서와 친분이 있던 김영도 동의과학대 총장을 만나 야구부 창단을 제안했다. A4 용지 30매 분량의 제안서를 직접 작성하고 대면 브리핑까지 진행하며 1달 동안 설득한 끝에 야구부 창단을 이끌어냈다. 야구부 창단에 적잖은 기간이 걸린 다른 지역 대학들과 비교하면 빠른 시일 내에 이뤄낸 성과다.

염종석 감독이 선수들을 직접 지도하고 있다. (사진=동의과학대 제공)
염종석 감독이 선수들을 직접 지도하고 있다. (사진=동의과학대 제공)

야구부 감독으로서 그는 선수단에게 항상 희망을 잃지 말자는 말을 한다.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며 학생들의 자율적 노력을 유도하게끔 코칭을 진행한다. 지명되지 못한 학생들이 다시 한번 기회를 붙잡은만큼 각각에 맞는 지도 방법으로 학생들이 야구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하도록 힘을 불어넣고 있다. 이를 위해 금전적인 여건이 되질 않아 야구부 입단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에게 등록금 면제를 시키고 장학금 지급을 요청하는 등 도전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대학 야구는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명받지 못한 고등학교 야구선수들이 실력을 길러 자신의 가치를 재증명하는 곳이다. 그래서 대학야구는 각 선수들에게 동일한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선수가 되지 못했다는 좌절감은 학생들을 항상 압박한다. 동의과학대 야구부도 창단 이후 현재까지 15명이 선수의 길을 포기했다. 게다가 최근 학령 인구 감소로 대학 야구 선수 자체가 줄어들고 있다. 그만큼 대학 야구의 길은 험난하다. 이런 힘든 상황 속에서 학생들이 즐겁게 야구를 하도록 돕는 것이 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노력 덕분일까. 창단한지 얼마되지 않아 1학년으로만 구성된 동의과학대 야구부는 4월부터 2달 간 열린 U리그(대학리그)에서 4위를 기록해 대학야구 왕중왕전에 진출할 정도로 의미있는 성과를 거뒀다. 염 감독은 “당장의 성적에 목매지 않고 선수 육성을 통해 5년 안에 대학야구 우승을 노리는 팀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며 “잠깐 스쳐가는 학생이라도 신뢰할 수 있는 따뜻한 선배이자 감독으로 비춰지고 싶다”고 포부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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