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 방송인, 요리사 다양한 ‘부캐’로 활약…“이것저것 재지 말고 일단 해라”
지난해 서울 대학로에 중식당 계향각 개업…배화여대 ‘창업 1호’ 교수
창업 첫걸음은 ‘용기’, ‘사장’ 직함에 따르는 책임 교수만큼이나 무거워
“창업 고민하지 말고 일단 해봐야” “남들이 60세 살 때 186세 산 느낌”

신계숙 교수는 그의 애마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전국을 다닌다. (사진=신계숙 교수 제공)
신계숙 교수는 그의 애마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전국을 다닌다. (사진=신계숙 교수 제공)

[한국대학신문 장혜승 기자] 일단 하고 본다. 올해로 예순이 됐지만 갱년기 열증 때문에 타기 시작한 오토바이 할리데이비슨은 여전히 그의 애마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이름도 생소한 토속 음식을 맛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신계숙 배화여대 전통조리과 교수의 이야기다. 신 교수는 교수라는 본업 외에도 방송인, 요리사라는 ‘부캐’로 활발하게 활동한다. 이제는 창업이다. 지난해 말 서울 대학로에 중식당 계향각을 개업해 ‘배화여대 창업 1호 교수’라는 타이틀까지 획득했다. 지난 1월 16일 잠시 손님이 없는 한가한 틈을 타 계향각에서 신 교수를 만났다.

창업을 준비하는 교수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을 묻자 명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일단 해라. 일단 하고 발생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 다음에 해결을 하면 되니까 이것저것 재지 말고 일단 해라.”

신계숙 교수가 인터뷰 당일 중식당 계향각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사진=장혜승 기자)
신계숙 교수가 인터뷰 당일 중식당 계향각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사진=장혜승 기자)

신 교수는 창업 교수 선배로서 현실적인 조언도 들려줬다. 신 교수는 창업을 하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로 △창업하겠다는 용기 △자본 △인력 △제도적 지원을 꼽았다. 이중 가장 중요한 건 용기라고 했다. 교수라는 안정된 직업을 탈피해 사업을 하려면 용기가 가장 중요한 준비물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도전이라는 건 실패 가능성도 50%, 성공 가능성도 50%라는 말이다.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라서 사람을 구해야 하는데 막상 창업을 하고 보니 사람 구하는 것도 어렵지만 임금 체계나 고용 체계가 옛날 제가 주방에 있을 때하곤 너무 다르더라”고 토로했다. 각종 회계나 세무 처리도 투명성을 기하기 위해서는 혼자서 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다고도 덧붙였다. 

교수가 창업하면 본업인 연구에 소홀하게 되지 않을까. 신 교수는 “당연히 소홀해지게 된다”면서도 “지금은 대학에서 학생에게 창업을 가르치고 창업하게 하라는데 누가 창업을 가르칠 것이냐”고 반문했다. 직접 해보고 가르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어 “제가 조리과 교수를 23년간 했는데 그거보다 한달간 식당을 개업하고 배운 게 더 많다”며 “강단에서 가르치는 것보다 다방면의 역할을 통해 배운 게 많아 학생들에게 해줄 말도 전방위적으로 더 많다”고 강조했다.

‘사장’이라는 새 직함에 따르는 책임도 교수만큼이나 무겁긴 마찬가지다. 그는 “선생을 하면서는 학생들하고 대화하는 게 자연스러운 거였는데 사장이 되고 보니 20대 직원의 마음을 이해하는 코드를 익혀야겠더라”고 말했다. 영어를 배워야 영어가 가능한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것처럼 이른바 MZ세대와 소통을 하려면 그들의 코드를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신 교수는 이를 “법을 지켜야 하고 폐를 끼치지 않아야 하고 MZ세대에게 불편을 주지 않아야 한다. 60대가 이해하기 어려운 코드일 것”이라고 부연했다. 

주방에서 요리하는 신계숙 교수 (사진=장혜승 기자)
주방에서 요리하는 신계숙 교수 (사진=장혜승 기자)

계향각에서 일하는 직원은 총 8명이다. 그중 20대는 4명이다. 하루 종일 주방과 홀을 누비며 고군분투하다 보면 동지애가 생길 만도 하다. 신 교수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고마운 마음이 가득 생긴단다. 그는 “월급을 줘야 하는데 오늘 300만 원 벌면 얘 하나 월급이 끝났구나 이런 생각이 든다”며 “현실적으로 사장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된다. 어제는 손님이 많아서 쉬는 시간을 1시간밖에 못 줬는데 오늘은 손님이 없어서 쉬는 시간을 확실하게 줬다”고 말했다. 영락없는 사장님의 말투다.

계향각 사장으로서의 또다른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소방수다. 조리사가 전날 술을 먹으면 간이 세지는데 손님들은 그걸 놓치지 않는다. 탕이 짜다고 항의가 들어오면 가서 진압하는 것도 신 교수의 몫이다. 서비스 요리 하나쯤 주면서 손님들의 안 좋은 기억을 지우는 역할이기도 하다. 신 교수는 이를 “불 끄는 소방수”로 정의했다. 직접 요리도 하는 주방장인 동시에 소방수 역할도 하는 셈이다.

계향각은 원래 서울 후암동에 위치한 요리 연구소였다. 중식당으로 바꾼 이유가 무엇일까. 신 교수는 “원래 정해진 사람만 와서 공부하고 음식을 먹는 곳이었는데 사람들이 당신 요리를 어디 가면 먹을 수 있느냐, 나도 먹고 싶다는 요구들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돈을 받고 밥을 팔 수도 없는 연구소 특성도 고려했다. 중국인 관광객에게 한국에도 제대로 된 중국 식당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자부심’도 한몫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나이였다. 그는 “곧 다가오는 예순을 어떻게 맞을지 고민하다 방송에서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했는데 난 그러고 사나 고민하다 하게 됐다”며 “남들은 문을 닫아 걸 때 오히려 개업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식당의 하루는 빡빡하다. 지난해 연말 개업한 이후 하루도 못 쉬고 있다. (3월 현재 월요일 하루를 휴무로 정해 쉬고 있다) 체력적으로 힘든 건 당연지사다. 그는 “개업 후 일주일이 되니까 하루만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도 “저를 보러 오시는 분들이 대부분이고 그 분들은 경기도 오산이나 심지어 경남 통영처럼 멀리서도 오시니까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했다”고 회상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중식 요리의 대가 이향방 선생의 향원에서 일을 배우던 20대 때부터 그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신념으로 텃세를 버텼다. 신 교수는 “남들이 60세를 살았다고 하면 저는 186세를 산 것 같다”고 웃었다.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건 아니다. 하고 싶은 걸 못 찾은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 그는 자기 관찰을 해보라고 조언한다. 특히 “기쁜 일”을 해야 한다라는 말을 건넸다. 물론 음식점 운영이 기쁘고 하고 싶은 일이라고 해도 매 순간 기쁘기만 한 건 아니다. 신 교수는 “생각해보니 너무 힘들어서 99만큼 힘들어도 1만큼 기쁜 희열이 있는 것 같다”며 “하고 싶은 건 하는 게 맞는 것 같다”고 조언했다. 
 
지난해 인기리에 방영된 한 토크쇼 프로그램에서 그는 인생 1막이 요리, 2막은 학문, 3막은 오토바이라고 말했다. 인생의 새 장을 거침없이 열어온 그에게 인생의 마지막 날이 다가온다면 어떻게 할지 물었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명쾌한 답이 돌아왔다.

“오늘 할 일, 지금 해야 할 일들을 당장 해야죠. 시장에 가서 장을 보고 요리도 하고. 결국 이렇게 하다 죽겠죠. 그렇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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