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택 계명문화대 교수

조규택 계명문화대 교수
조규택 계명문화대 교수

해마다 4월이면 자랑스러운 해군 선배이자 구국의 영웅이신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탄신일(28일)을 생각하게 된다.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충무공 이순신은 전란의 위기에서도 《난중일기》를 비롯한 수많은 문장과 경구를 남겼다. 공의 어록 가운데 「진중음(陣中吟)」(진중에서 읊음)이란 오언 율시가 있다. 이 율시의 제5-6행에 “서해어룡동(誓海魚龍動) 맹산초목지(盟山草木知)”, ‘바다에 맹세하니 물고기와 용이 감동하고, 산에 맹세하니 나무와 풀이 아네’가 등장한다.

이「진중음」의 배경은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피했고 왕자들이 위태로운 상황에 있었을 때다. 한 외로운 수군 장수로서 공이 어떻게 나라를 구할 것인가를 노심초사하며 쓴 한시다. 서해맹산은 이충무공 사후 200여 년이 지난 1795년, 공을 흠모한 정조대왕께서 공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면서 합성한 경구(epigram)다.

요즘 공정한 경쟁을 통해 다시 정의가 되살아날 것이라며 새 시대에 대한 기대감이 가득하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겨울에서 봄이 되기 위해 겪는 꽃샘추위 같은 냉냉함이 만연한 듯하다. 이런 냉기가 흐르는 현실을 보면서 이충무공의 언행을 생각하며 공께서 실천하신 명예‧헌신‧용기를 떠올려본다. 명예, 헌신 그리고 용기는 사회 지도층이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기본 덕목이다. 나아가 앞으로 우리나라의 사회 지도층이 반드시 명심하고 실천해야할 가치임에 틀림없다. 명예‧헌신‧용기는 사즉생(死則生)을 실천하신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사생관이기도 했다. 

필자는 이즈음 ‘서해맹산’을 다시 떠올려 오늘 우리의 마음에 되새겨 보고자 한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됐지만 남은 판옥선은 12척에 불과했다. 고립무원의 이충무공은 필사즉생의 각오로 다시 ‘서해’와 ‘맹산’을 다짐했을 것이다. 공은 임금 선조의 거듭된 의심과 막내아들 면의 전사와 괴멸 직전에 있는 최악의 수군 전력으로도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한다. 공의 그 평정한 정신은 우리의 이정표로써 언제까지나 그 역할을 다할 것이다. 

임시정부 주석을 지냈던 백범 김구 선생이 1946년 경남 진해를 방문했을 때 이충무공의 해당 구절을 친필로 남겼다. 해군사관학교로 이어진 3 정문 입구의 남원로터리에는 <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 대한민국 29년 8월 15일 김구 근제>라고 쓴 김구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진해는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해군의 주둔지이자 대표적 근대 계획도시로 건설된 곳이다. 아이러니하지만, 이 비석은 이충무공에 이어 백범 김구 선생이 후대에 “다시는 일제에 흔들리지 말라”고 역설한 경고의 의미로도 해석된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해상에서 연승을 거두고 일본의 수륙병진 작전을 좌절시키며 나라를 구한 인물이다. 공은 남해안 일대의 일본 수군을 완전히 소탕했고, 여수에서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 구국의 영웅이 탄생하신 4월에 우리 해군은 1949년 4월 15일 해병대를 창설한다. 해병대는 해군에서 선발한 정예 요원으로 진해 덕산 비행장에서 창설됐으며 오늘날 국가전략기동부대로 그 역할을 충실히 다하고 있다. 해군과 함께 해병대도 공의 후예로서 바다를 플랫폼으로 작전한다. 새 시대를 맞아 공께서 탄생하신 4월에 서해맹산(誓海盟山)의 마음으로 해양 강국 대한민국의 도약과 발전을 간절히 기원해 본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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