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형찬 수필가 겸 교육학자

백형찬 수필가 겸 교육학자
백형찬 수필가 겸 교육학자

이인상의 호는 능호관이다. 그의 집안은 명문가였다. 고조할아버지가 인조 때 영의정을 지냈고 그 후 3대에 걸쳐 정승을 배출했다. 그런데 증조할아버지가 서자가 되는 바람에 그 맥이 끊기고 말았다. 이인상은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서자 집안이라 본과 시험을 볼 수가 없었다. 이인상의 첫 벼슬은 경남 함양에 있는 사근역의 찰방(종6품)이었다. 찰방은 각 도의 역참 일을 맡아 보던 외관직 벼슬이다. 

이인상이 청렴하게 관리 생활을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인상은 거의 날마다 먹을 갈고 붓을 잡아 산수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사근역 찰방으로 부임하고 나서는 가지고 있던 모든 그림을 불살라 버렸다. 사람들은 몹시 놀랐다. 그 아깝고 귀한 그림들을 불태워버린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찰방으로서 올바르게 정사를 보는 데 그림 그리는 것이 방해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시인이자 유명한 실학자인 이덕무는 이인상을 높이 존경했다. 이덕무 역시 서자 출신이었는데 이인상과 똑같이 사근역 찰방이 됐다. 

이덕무는 취임 후에 사근역에서 가장 오래 근무한 사람에게 물었다. “이곳에서 찰방으로 근무했던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누구냐?” 그 사람이 대답했다. “능호관 이인상입니다.” 이렇듯 이인상은 작은 벼슬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성실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최선을 다해 일해 아래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 후 음죽 현감이 되었는데 일에 부당하게 간섭하는 관찰사와 심한 갈등을 겪었다. 이에 현감직을 사직하고는 시골로 내려와 조용히 살았다. 

한 폭의 이인상 초상화가 전해진다. 깨끗한 상태로 보존돼 그의 모습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림 오른쪽 위에 ‘凌壺 李麟祥 先生 眞’이라 적어놓아 이 초상화의 주인공이 이인상임을 밝히고 있다. 짙은 눈썹, 어진 눈매, 반듯한 코, 큰 귀, 과묵한 입술, 가지런한 수염 그리고 바르게 갖춰 입은 의관 등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이인상은 조선 선비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누가 뭐라 해도 이인상의 대표작은 ‘설송도(雪松圖)’이다. 하얗게 눈이 덮인 두 그루의 소나무가 화폭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한 그루는 그리스 신전 기둥처럼 치솟아 하늘을 떠받들고 있고 또 한 그루는 다른 소나무의 옆구리를 직각으로 스치며 휘었다. 흰 눈이 소복이 쌓인 푸른 소나무 잎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싱싱하다. 그 멋진 소나무를 보니 한없는 존경심이 우러나온다. 엎드려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생각까지 든다. 소나무 밑동을 받치고 있는 것은 거칠게 칠한 바위이다. 그 바위에서 솟아오른 강인한 생명력에 무한한 찬사를 보낸다. 설송도는 두 그루 소나무를 위와 아래 그리고 왼쪽과 오른쪽 이렇게 네 방향으로 잘라 냈다. 어떻게 그렇게 소나무를 잘라 낼 생각을 했을까? 잘라 냈기 때문에 설송도가 주는 무게감은 더욱 커지고 분위기는 더욱 신비로워졌다. 미술평론가 오주석 선생은 설송도를 대하면 “내 앞에 능호관 그분이 실제로 서 있는 듯한 엄숙한 느낌을 갖게 된다”고 했다. 

필자는 설송도를 처음 본 순간, 베토벤의 교향곡 ‘영웅’의 1악장이 떠올랐다. 현악기와 관악기가 뿜어내는 그 웅장한 소리를 듣는 듯했다. 대학 시절에 나는 홀로 배낭을 메고 겨울 설악산을 찾곤 했다. 한번은 얼어붙은 비룡폭포를 보고 내려오는데 하얗게 눈 덮인 소나무 숲 골짜기에서 교향곡이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기가 막히게 멋진 설악 풍경과 클래식 음악이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필자는 그 순간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감격했다. 내 생애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황홀을 맛본 것이다. 당시에는 설악산 안에서 감자전과 막걸리를 파는 오두막이 있었다. 그 음악은 그 오두막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눈 덮인 설송도를 보니 문득 그 시절 그 설악이 떠오르며 그리워진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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