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택 계명문화대 교수

조규택 계명문화대 교수
조규택 계명문화대 교수

우리는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때 능(陵)이라고 한다. 반대로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를 때 총(塚)이라고 한다. 무령왕릉은 발굴 결과, 묘지석(墓誌石)을 통해 무덤의 주인이 백제 25대 무령왕(재위 501-523)의 무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신라의 금관총(金冠塚)과 천마총(天馬塚)은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 몰라서 대표적인 출토품을 무덤의 이름으로 붙인 경우이다. 금관총은 신라의 고분 중 최초로 금관이 출토되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역시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 형태의 천마총에서도 금관, 금제관모, 금제과대가 출토됐다. 그러나 천마총의 경우엔 여러 겹의 자작나무 껍질에 선명하게 그려진 천마도가 1500년을 견디면서 발견됐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2021년은 백제 무령왕릉의 무덤이 발굴된 지 50년이 돼 그 기념으로 국립공주박물관에서 특별 전시회를 열었다. 필자는 전시회 막바지에 ‘무령왕릉 발굴 50년’ 전시회와 벽돌로 조성된 왕릉 내부를 관람할 수 있었다. 먼저 무령왕릉 발굴 과정을 살펴보면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송산리 고분군이 조사됐고 1971년 7월 제6호 벽돌무덤 내부에 스며든 유입수를 막기 위해 배수로 공사 중에 왕릉의 입구가 드러나게 됐다. 무령왕릉은 제6호 벽돌무덤 북쪽에 위치했고 도굴과 같은 인위적인 피해가 없이 완전하게 보존된 상태를 보였다. 특이한 것은 무덤을 지키는 진묘수라는 돌짐승이다. 이 돌짐승은 악귀를 막고 사자(死者)를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하는데 중국의 것이 흙으로 빚은 데 비해 돌로 만든 것이다.

무령왕릉은 무덤의 주인공이 훌륭한 군주라는 점에서 주목이 되지만 무덤에서 발견된 금으로 만든 관장식을 비롯해 4600여 점에 이르는 다량의 유물이 발굴됐으며 12종목 17건이 국보로 지정됐다. 더군다나 벽돌무덤은 기존의 굴식 돌방무덤이었던 백제 무덤과 달리 중국 남조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일본의 금송을 이용해 관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중국과 일본과의 문화적 교류도 활발했음을 말해준다. 그 당시 백제의 국제성을 확인할 수 있다. 

신라의 금관총은 1921년 9월 가옥 수리 중 우연히 발견된 돌무지덧널무덤이다. 이 고분에서 처음으로 금관이 출토됐기에 금관총이라 부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무덤은 전문 고고학자에 의한 발굴조사가 아니라 모로가 히데오라는 총독부 박물관 촉탁 일본인에 의해 도굴에 가깝게 발굴됐다. 총독부 발굴전문가가 경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발굴이 끝났고 상당한 문화재가 일본으로 밀반출됐다. 금제 장식 3만여 점을 비롯해 발굴된 우리 문화유산을 제국주의 일본은 자신의 것으로 전 세계에 선전했다.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신라의 찬란한 금관과 금제 장식은 일제 식민치하의 울분을 달래준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금관총에서 출토된 금관은 1962년 12월 국보로 지정됐으며 국립경주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금관을 비롯한 각종 금제 장식은 삼국시대의 신앙을 반영한 것으로 샤머니즘과 관계가 있다. 사슴뿔 형태와 유사하고, 시베리아 샤먼의 금속제 관에 녹각과 새의 깃털 장식이 있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신라 금관의 형태는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북방의 초원지대 무덤에서 출토된 금관에서도 보인다. 황금의 나라 신라의 금관은 전 세계에서 출토된 10여 개 금관의 절반이나 차지한다. 백제 무령왕릉과 신라의 금관총이 6세기 초 우리 민족의 찬란한 문화유산이라는 점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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