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열 고려대 연구처 부장

유신열 고려대 연구처 부장
유신열 고려대 연구처 부장

2040년을 바라보는 서울대학교 중장기 발전계획 보고서가 지난 8월 초 서울대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됐다. 이 보고서에서 밝힌 서울대의 위기진단과 반성은 솔직했다. 위기의 주요 원인은 △대학에 내재해 있는 퇴행적 조직문화와 경직적 의사결정 구조 △운영시스템의 전문성 결여와 내부 자정 능력 부족 △효율적이고 투명한 거버넌스 부재 △열악한 자원과 재정이라고 진단했다.

이러한 성찰을 바탕으로 수립한 부문별 발전계획과 실천방안은 구체적이다. 모든 대학이 홈페이지나 사업계획서에 서로 앞다퉈 치적 홍보에 힘을 쏟고 있는 상황에서 서울대의 솔직한 보고서에 더욱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칭찬이란 본래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대학은 어느 순간부터 자기 칭찬 경쟁에 내몰리게 되었다. 1983년 US News and World Report(US News)가 처음으로 미국의 대학평가를 통해 순위를 매기면서부터 대학들이 이러한 이상한 기류에 더 휩쓸리지 않았을까 한다. 이번 서울대의 보고서는 한편으로 대학을 대표해서 쓴 대학의 반성문으로 읽혔다. 과대포장 경쟁보다 성찰하는 자세로 차분하게 미래를 생각하는 서울대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어느 한 대학의 노력만으로는 구조적으로 혁신하기 어렵다. 정부의 재정지원이나 사회의 기부금 없이 자립할 수 있는 대학은 없다. 대학의 설립조건, 입학정원, 연구비나 간접비 용도는 대학이 스스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부의 규제만으로도 대학의 규제 울타리는 충분하다. 대학과 대학은 독립적 관계가 아니라 서로 긴밀히 연결된 하나의 지식생태계다. 예를 들어 모든 대학이 1대1 학점교류를 하는 상황에서 어느 한 대학만이 다른 대학에 학점교류 문호를 전면 개방하겠다고 선언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이는 K 대학의 교육 개방 선언을 통해 이미 실험한 바가 있다. 본지 2018년 10월 29일 자 ‘교육 개방과 공유대학’을 참고).

따라서 한 대학의 혁신은 정부와 사회, 그리고 모든 대학이 동시에 노력하고 동참해야 가능하다. 이번 서울대 보고서는 서울대만의 계획이 아니라 모든 대학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점을 진단하고 함께 헤쳐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 이번 기회에 대학들이 동참해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대학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함께 길을 찾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발전계획은 누가 읽고 실천할 것인가? 그동안 대학도 혁신을 위해 부단히 애써왔다. 하지만 ‘학문의 자유와 종신 임용의 기본원리’를 지지하는 교수, 그리고 전문화된 관료조직을 굳건히 지키는 직원의 조합으로 이뤄진 지금의 대학 거버넌스로는 다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없다. 서울대 보고서에도 현 상황을 ‘호족 국가’, ‘봉건 영주제’ ‘지식자영업자연합회’ 혹은 ‘조직화된 무정부(organized anarchism)’, ‘총장만 2200명’이라는 설문조사 표현을 통해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대학혁신을 교수 개인 역량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열악한 연구환경은 그대로 두고 특정 교수에게 연구비를 많이 준다고 연구환경이 개선되거나 좋은 연구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연구비를 많이 받은 교수는 연구행정에 지쳐 정작 연구는 더 소홀하게 된다. 대학의 혁신을 위한 거버넌스는 기존의 교수와 직원 이외에 제3의 역량 집단이 필요하다. 그들은 교육 및 연구 코디네이터, 지식 큐레이터, 연구장비 엔지니어, 디지털 리터러시, 기업경영, 미디어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 역량, 그리고 대학과 대학, 기업, 지역사회, 정부를 하나의 지식 클러스터로 연결해 가치를 창출하는 역량을 가진 전문가들이다. 이들을 양성하고 이들이 변화를 주도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대학이 ‘조직화된 무정부’라는 오명을 벗어나 지속적인 개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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