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혁진 연출가(2030부산EXPO 서포터즈 서울협의회 사무국장)

조혁진 연출가(2030부산EXPO 서포터즈 서울협의회 사무국장)
조혁진 연출가(2030부산EXPO 서포터즈 서울협의회 사무국장)

나에게 첫 앵글의 시작은 고등학교로 거슬러 올라간다. 돌이켜보면 그 준비과정부터 세상을 새로운 초점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도 앵글의 변화에 따라 내 인생의 새로운 초점이 맞춰지고 그 초점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중학교 3학년 때 70mm 줌 렌즈가 장착된 카메라가 출시됐다. 이 소식을 접한 직후부터 나는 온 신경이 어떻게 하면 저 카메라를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쏠렸다. 당시 카메라의 가격은 24만 원. 고등학교 선생님인 아버지의 신분을 이용해 공무원 연금센터에서 구입하면 21만 원에 구입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고민고민하다가 내린 결정은 새벽에 신문을 돌리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었다. 새벽 4시 30분 베급소에 도착해 광고지를 신문 속에 넣고 5시 30분부터 배달을 시작했다. 7시까지 배달을 완료한 뒤 등교를 준비했다. 한 달 월급은 7만 원. 10월에 시작해 고등학교 입학 전 까지 5개월 동안 신문배달을 했고, 그렇게 모은 35만 원으로 드디어 70mm 줌 카메라를 구입할 수 있었다. 필름 구입과 인화 비용까지 여유있는 자금도 만들어졌다. 스스로에게 선물한 고등학교 입학선물인 셈이었다.

첫 카메라로 내가 제일 먼저 잡은 앵글은 새벽길이었다. 까까머리 중학생이 신문배달을 하면서 바라본 세상은 참 따뜻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쌓인 새벽길, 반갑게 인사해주던 청소부 아저씨, 가끔씩 요구르트를 챙겨주던 요구르트 아줌마, 고생이 많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경비원 아저씨 등등. 자연스럽게 나의 앵글은 사람에 초점이 맞춰졌다. 앵글이 사람에 맞춰지다 보니 나의 생각과 행동도 사람들의 관계와 바른 삶을 향해 가게 됐다. 

고등학교 입학 후에는 상당히 힘든 시간이 찾아왔다. 건강에 이상이 생기다보니 자연과 접하는 시간들이 많아졌고 나의 앵글은 어느새 자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사람에게 맞춰졌던 나의 의식세계가 자연이라는 앵글로 옮겨가면서 또다른 경험들을 하게 됐다.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을 제공해주는 자연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이 지친 나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준 것 같다.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된 다음 소풍이나 수학여행 체육대회 등 학교의 모든 행사 촬영을 내가 전담했다. 촬영하고 인화해주고 나면 용돈벌이가 되는 뜻밖의 행운이 이어졌다. 사람과 자연을 한 앵글 안에 넣고 초점을 바꾸는 재미에도 푹 빠져들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나는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사진’에 머물러 있던 나의 앵글은 ‘영상’이라는 앵글로 옮겨가게 됐을 뿐만 아니라 움직이는 앵글로 만나는 세상은 더 많은 것을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었다. 이는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주는 특별한 경험으로 나의 삶을 더욱 역동적으로 변화시켜줬다. ‘VX1000’이라는 기종으로 시작해 ‘M9000’, ‘M10000’으로 영상기술의 발전을 고스란히 체감하며 시야를 넓혀갔다. 1CCD, 2CCD, 3CCD로 화질도 고화질로 발전해갔으며 PD100, PD150에 이르러서는 가볍고 성능 좋은 단계까지 경험할 수 있었다.

대학방송국은 이런 시대를 가장 빨리 접하고 실습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준 무한히 열린 연습장이었다. 가정용 비디오데크 두 대를 놓고 일대일 아날로그 편집을 시작하면서 촬영에서의 앵글뿐 아니라 편집에서의 앵글까지 생각하게 됐다. 앵글을 잡고 초점을 맞추는 것에 좀 더 신중히 접근하는 습관이 들기 시작했다. 오디오 스튜디오를 분할해 TV스튜디오를 만들고 창고로 쓰던 공간을 영상편집실로 개조하면서 TV방송을 준비했다.

TV방송을 준비하던 대학방송국들끼리 정보를 교환하고 서로의 오답노트들을 공유하며 전국 방방곡곡 많은 대학 방송국들과 교류하면서 앵글을 통해 보는 세상은 더욱 넓어졌다. 이젠 조명에 따른 앵글까지 고려하면서 새로운 몽타쥬를 만드는 것까지 앵글의 각도와 초점에 따라 표현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좀더 지나자 프리미어라는 논리니어 편집 프로그램이 개발되면서 또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아날로그 편집에서 디지털 편집으로 전환되면서 촬영에서 만들어지는 앵글과 함께 편집으로 만드는 앵글과 초점이 더해졌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은 생각보다 많은 고민과 숙제를 풀어내야 했고 영상에서만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 전체가 변화하고 있었다. 모든 생활 패턴이 변화하는 것이었다. 앵글로 보는 세상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다 주었다. 보이는 부분과 보여지지 않는 부분을 선택할 수 있게 됐고, 눈으로 보는 현실과는 전혀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 아름다움을 추함으로, 자연스러움을 부자연스러움으로 보이게 할 수도 있었다.

이 같은 앵글의 조작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괴리감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앵글을 통해 대중에게 전달되는 결과물들이 의도를 가진 것이라면 상당한 혼란을 야기시키는 것도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면서 대학에서의 작품들은 최대한 현실을 바탕으로 결과물을 만드는 것에 집중했고, 이러한 훈련들은 현재까지도 앵글의 초점이 바른 방향을 향하도록 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고백하자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앵글과 초점의 변화는 7년 전에 찾아왔다. 오른쪽 눈은 망막박리가 와서 시력이 현저히 떨어졌고 왼쪽 눈은 원인불명으로 불빛만 구분이 가능한 상태다. 시각장애인이라고 적힌 복지카드도 발급됐다. 흔히들 말하는 ‘멘붕’이 찾아왔다. 무대를 연출하고 영상을 연출하고 앵글과 초점에 따라 세상을 살아온 나에게 앞으로 어떤 미래가 펼쳐질까 막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곧 깨닫게 됐다.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나조차도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앵글과 초점이 생긴 것이다. 이때부터 나의 작품들은 창작물이 주를 이뤘다. 나만의 시선으로 스스로 만들어가는 창작물들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한국을 떠나서 새로운 환경에서 그 시도들을 이어나갔다. 아시아한상대회를 총연출하고 아시아 비치 게임즈 개막식 피날레를 연출하고 베트남의 역사를 기반으로 한 ‘다나쇼’를 기획·제작하고 연출했다. 닫힐 것만 같던 앵글이 더욱 활짝 열린 기분이랄까.

나는 다시 새로운 앵글과 초점을 찾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처음으로 앵글을 잡았던 아름다운 사람들부터, 황홀한 자연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앵글로 잡았던 순간들, 나아가 대학시절 영상으로 담았던 여러 가지 사회 문제들과 역동적이다못해 격동적이었던 시대 상황들을 건너 한쪽 눈으로 만들어가는 앵글에 이르기까지, 앵글을 선택하고 초점을 어디에 맞출지 선택해왔고 앵글 밖의 삶도 내가 정한 앵글과 초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게 살려고 노력해왔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간명하다.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 때 나의 삶을 여러 가지 앵글로 잡아보고 거기에 따른 초점을 맞춰 보라는 것이다. 넓은 앵글로 전체를 살펴보고 버릴 부분을 제외하면서 앵글을 좁혀가 보자. 그렇게 나만의 앵글을 만들었다면 그 다음에는 어디에다가 초점을 맞출 것인지 정하는 과정을 만들 수 있다. 초점에 따라 주변 환경은 완전히 달라진다. 내가 만든 앵글, 내가 맞춘 초점에서, 내가 주인공으로서 프레임 안으로 들어간다면 나만의 영화가 시작될 것이다. 영화가 마음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다. 다른 앵글로 다시 시도하면 된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청춘이라면 그것이 젊은 시절에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한국대학신문>

저작권자 © 한국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