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상기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진학지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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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1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진로 특강을 했다. 강의가 끝나고 상담을 요청한 K군, 진로에 대한 상담이었다. 그는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다고 했고 비행기 조종사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필자는 왜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자 하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다양한 경로를 설명했다. 공군 조종사가 되기 위해서 갈 수 있는 대학과 경로를 설명해줬다. 그러나 며칠 후에 다시 메일이 왔다. 자신이 비행기 조종사가 되는 것이 맞는지, 항공산업에 종사하는 것이 맞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아직 고등학교 1학년이지만 진로를 정확히 결정한 후에 공부해야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기에 빨리 정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학생에게 앞으로 인생에서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반드시 결정하라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일찍부터 진로를 결정하면 유리한 점이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결정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대학 입시의 수시전형에서 학생부종합전형으로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려면 진로를 빨리 결정했야 한다는 말들이 많은 사교육 관계자와 진학 전문가들 사이에서 유행한 적이 있었다. 또 일부 대학에서는 학생의 진로를 정한 후에 그에 맞는 노력을 얼마나 어떻게 해 왔는가가 학생 평가의 기준이 되기도 했다.

그로 인해 고등학교 학생들은 진로 결정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힌다. 학교생활기록부의 내용도 개인의 성장보다는 진로에 맞춰 억지로 맞추려고 한다. 미처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지 못한 고1, 고2 학생들은 큰 잘못을 한 사람과 같은 모습이다.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좋아하는지를 몰라서 진로를 결정하지 못했지만 대학 입시에서 실패하고 인생을 실패자로 살 것 같다는 걱정을 한다. 학부모도 자기 자녀가 아직 하고 싶은 것이 없다고 자녀를 타박한다.

이런 점은 학생부종합전형의 어두운 면이다. 진로를 빨리 정해야 한다는 학생부종합전형의 평가 요소는 학생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지금이야 진로가 변해도 괜찮다고 하는 대학이 많아졌지만 아직도 학생들은 자신의 진로를 빨리 정하지 못한 부담감을 안고 있다. 어린 시기에 진로를 결정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성장하고 성숙해 가면서 사회의 변화와 기술의 발전에 대응하면서 결정하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실제로 학생들에게 일찍 진로를 결정하라고 말하는 대학의 모든 담당자가 청소년 시절부터 지금의 진로를 선택해 공부한 후에 지금의 그 직업에 종사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렇게 말하는 진학 전문가들도 청소년 때부터 진학 전문가가 되기 위해 준비한 것은 아니다.

진로는 한 개인이 처한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이제 갓 10대 후반에 접어든 학생이 세상을 얼마나 알고 직업 세계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자신의 진로를 온전히 결정할 만큼의 경험과 이해도는 없는 경우가 많다고 봐야 한다. 한 개인이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은 그가 처한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진로는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과 별개로 처한 상황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고등학교 1학년 학생에게 장차 무엇을 할 것인가를 바로 결정하라고 하는 것은 이제 이유식을 먹는 아이에게 좋아하는 요리가 무엇인지 말하라고 강요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아이의 성장을 억제하는 것이다.

필자는 K군에게 이런 답장을 보냈다.

“네가 성장해서 비행기 조종사가 되든, 항공 관련 사업을 하든 지금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어떤 것을 하겠다는 결정은 한낱 구호에 불과할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네가 장차 비행기 조종사가 되거나 사업을 할 능력을 갖췄는가이다. 그래서 지금은 누구도 따라잡지 못할 실력,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하는 시간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하나로 결정하지 말고 큰 틀만 잡고 다양한 것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 두어라. 네가 성장해가고 사회가 변하면서 너의 생각과 진로는 변할 것이다. 그때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 이상으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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