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수 한양대 에리카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박기수 한양대 에리카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박기수 한양대 에리카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최근 한국 드라마가 착해졌다. 뚜렷한 갈등이 없거나 연성화되고 그 대신 다양한 즐길 거리를 새롭게 제공하는 방식의 착한 드라마로 바뀌고 있다. 몇 년 사이 지속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응답하라’ 시리즈나 ‘슬기로운’ 시리즈만 봐도 이러한 성격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특정시대의 추억을 소환하면서 향유자가 자신을 투사할 수 있는 다양한 캐릭터와 그 시절 그 나이에 누구나 경험했음직한 보편적인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던 ‘응답하라’ 시리즈, 특정 직업군이나 공간의 특수성을 전면화하지만 캐릭터 간의 갈등보다는 상호 이해의 따듯한 결말로 훈훈하게 만들었던 ‘슬기로운’ 시리즈로부터 그러한 경향이 부상한 것은 분명하다.

이 두 시리즈 외에도 금방 떠올릴 수 있는 작품은 ‘동백꽃 필 무렵’, ‘나의 해방일지’, ‘스물 다섯 스물 하나’, ‘그해 우리는’, ‘술꾼 도시 여자들’, ‘유미의 세포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등이다. 이 작품들의 특징은 갈등을 최소화하는 대신 다양한 장르를 하이브리드 형태로 혼합하고 선인, 악인의 구분보다는 개성 강한 매력적인 캐릭터를 다수 등장시킨다. 사회문화적 콘텍스트(context)와 느슨한 연결을 유지하고 다양한 즐길 요소를 추가함으로써 차별화하는 서사 전략을 보여준다.

올 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예를 보자. 이 작품은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변호사라는 설정을 활용한 법정드라마다. 멜로적인 요소와 출생의 비밀과 같은 요소를 영리하게 조합하고 법정드라마의 성격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악인 설정보다는 우영우의 활약을 기반으로 하는 동화 같은 화해를 보여줌으로써 갈등이 지극히 연성화되고 있다. 사회적 소수자의 문제를 일관되게 법정 소재로 활용하거나 소수자의 관점에서 소수자의 문제를 천착하는 방식을 활용해 사회문화적인 콘텍스트와 연결을 보여주고 있다. 우영우 인사법이나 말투, 캐릭터들의 코믹한 설정, 고래의 극적 등장 등과 같은 새로운 즐길 거리를 제공하는 착한 드라마의 성향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갈등은 서사의 핵심이자 동력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이야기는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다’고 한 것도 갈등을 염두에 둔 구분이었다. 《시학》의 전통을 따르는 현대 서사론의 관점에서 볼 때 서사는 갈등의 발생과 해소 과정을 통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속 깊은 성찰에 이를 수 있게 하는 미덕을 지녔다. 더구나 대중들의 수요와 반응을 가장 기민하게 대응하는 드라마는 갈등을 통해 가치, 장르, 구조 등이 결정돼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한국에서 인기를 끄는 드라마에서 갈등이 사라지거나 연성화됐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드라마의 갈등을 보면서 그 문제를 생각해보고 공감하고 성찰하는 과정을 불편해하는 향유자가 늘고 있는 것이다. 향유자가 갈등을 불편해하며 갈등 없이 즐길 거리를 선호한다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갈등 역시 드라마의 중심적인 즐길 거리였으니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즐거움이 생겼다는 게 문제가 될 리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이 현실의 갈등이 너무 심해서 드라마에서까지 보고 싶지 않다는 피로감이거나 삶의 과정으로서의 갈등을 피하고 즐길 거리의 세계 안에만 머물고 싶은 현실 회피의 결과라면 문제가 될 것이다. 착한 드라마뿐만 아니라 자극적인 소재를 극단적인 대립을 통해 풀어가는 최근 장르물까지도 갈등의 전개과정보다는 극렬한 대립만 부각되고 있기에 더욱 문제는 심각하다.

이야기가 허구임에도 강한 힘을 지닌 것은 그것이 삶의 혼돈에 질서를 부여해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치 있는 질서의 모색에 있어서 핵심이 갈등이다. 갈등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고 서로 다른 의견과 욕망일 살펴보고 충돌을 통해 조율하고 지지하는 가치를 결정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나와 세계에 대한 성찰에 이르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드라마에서 갈등이 연성화되고 갈등의 과정은 생략된 채 대립만 남았다면 더 이상 드라마를 통한 가치 있는 성찰을 기대할 수 없는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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