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택 계명문화대 교수

조규택 계명문화대 교수
조규택 계명문화대 교수

의민공 이억기(李億祺, 1561-1597)는 일찍이 충무공 이순신(李舜臣)과 막역한 인물이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충무공의 막하 인물이기도 했다. 이억기의 자는 경수(景受)다. 남달리 효자로 이름이 높았으나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전사한다. 충무공 이순신(1545-1598)보다는 16살 아래로 불과 32세에 전라도 서쪽 바다 해남을 근거지로 하는 전라우수사가 된다. 48세의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53세의 경상우수사 원균과 크게 비교된다. 그도 무의공(武毅公) 이순신(李純信)처럼 전주 이씨로 왕실 후손으로 특혜를 입기도 하지만 남다른 무인의 자질을 갖추었기에 무과에 일등으로 합격한다.

이억기는 어려서부터 무예에 뛰어나 17세에 왕실의 말과 수레를 관리하는 사복시 내승(內乘)이 됐고, 곧이어 무과에 급제한다. 약관 21세에 종3품 경흥부사에 임명됐으며, 23세 때 울지내, 니탕개 등 여진족이 두만강을 넘어 침입해 올 때 큰 공을 세운다. 26세에는 함경도 최북단 온성부사가 된다. 여진족이 경흥 부근을 침입하자 북병사 이일이 마침 조산보 만호였던 충무공 이순신과 경흥부사 이경록을 체포‧구금했을 때 온성부사 이억기는 두 사람을 변호하게 된다. 이렇게 이순신과 이억기의 인연은 시작됐다. 1591년(선조 24년) 32세 때 순천부사를 거쳐 정3품 당상관인 전라우수사에 임명된다.

왜란이 일어나 해전을 앞두었을 때 이충무공이 전라우수군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연합함대로 해전을 벌인 것은 제2차 출전(1592년 5월 29일~7월 7일)의 세 번째 전투이니 당황포 해전부터이다. 임진왜란 초기에 이억기의 전라우수군은 이충무공의 연합함대 요청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이는 전라우수군의 전투해역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옥포, 사천, 당포해전 같은 초기에 함께하지 못했지만 이억기의 전라우수군 합류는 조선 수군의 사기를 매우 더 높였다. 참전이 다소 늦었지만 이억기는 이후 해전에서 큰 역할을 수행하며 이충무공과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이충무공이 무고로 조정에 잡혀가 문책을 받게 됐을 때도 이항복, 김명원 등 조정 대신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의 무죄를 변론한다.

한산도에서 통제사 휘하에 머물던 전라우수군은 본영인 해남으로 가지 못해 몹시 고생하기도 했다. 본영이 그리워 통제사에게 휘하 세력을 이끌고 해남에 다녀오기를 간청하지만 허용되지 않아 두 사람 사이가 서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충무공과 이억기는 이내 서로를 이해하며 의기투합했고, 이억기는 통제사 이순신을 적극 지지하곤 했다.

이억기는 1597년 정유재란 때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한다. 수하 군관이 후퇴를 권고했지만, 패전한 장수로서 깨끗한 죽음을 택하기로 작정하고 충청 수사 최호와 함께 최후까지 항전하다 전사한다. 최고 지휘관 통제사 원균이 배와 부하를 버리고 거제도 뭍으로 도망가다 왜군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해전의 특성상 그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으며 아차산에 의관(衣冠)으로만 장사를 지냈고, 이후 하남시 배알미동에 신도비를 세웠다. 사후에 선무공신 2등에 책봉됐으며, 병조판서가 추증됐다. 정조대왕 때 의민(毅愍)이라는 시호를 내리며 완흥군(完興君)에 추봉된다. 대한민국 해군은 의민공 이억기를 209(장보고)급 잠수함의 9번 함(SS-071)으로 명명하며 그를 기리고 있다. 잠수함 이억기함은 장보고급의 마지막 잠수함으로 대우조선에서 순수 우리나라 기술로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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