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형찬 수필가 겸 교육학자

백형찬 수필가 겸 교육학자
백형찬 수필가 겸 교육학자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는 비명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는 세손 때부터 학문을 연마해 자신감을 가지고 군사(君師 : 임금인 동시에 스승)의 군주상을 표방했다. 할아버지 영조는 손자인 이산(정조)을 무척 아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영조가 이산을 한 번도 꾸짖지 않고 칭찬만 했다고 나온다. 이산을 못마땅하게 여긴 노론 대신들은 이산을 암살하려고 했다. 이를 알아차린 이산은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했다. 그래서 일부러 첫닭이 울기 전까지는 잠을 자지 않고 책만 읽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게 되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두꺼운 옷을 입고 잤다.

정조 시대는 경제적으로 강력했으며, 문화적으로도 청나라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문화대국이었다. 조선 후기 회화를 살펴보면 영조 시대에는 조영석, 정선, 심사정, 이인상 등의 문인 화가가 주도적으로 활동했고, 정조 시대에는 김홍도, 신윤복, 이인문, 김득신 등의 도화서 화원들이 주도적으로 활동했다. 정조 시대에 조선 회화 미술이 크게 발전하게 된 데에는 세 사람의 역할을 컸다. 이들은 강세황과 김홍도 그리고 정조이다.

현재 정조의 작품으로 남아 있는 것은 ‘국화도’와 ‘파초도’ 그리고 ‘묵매도’(墨梅圖)다. ‘국화도’와 ‘파초도’는 동국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고, ‘묵매도’는 서울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국화도’는 원래 이왕가(李王家) 일본 도쿄 저택에 있던 작품이었는데 도쿄에 사는 한 교포가 입수해 동국대에 기증했다. ‘국화도’는 먹으로 여러 송이의 국화를 그렸는데 마음이 깨끗하지 못한 사람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높은 기품을 지니고 있다. 또한 국화 꽃잎 한 장 한 장을 섬세하게 그려 마치 신사임당의 화조도를 보는 듯하다. 국화는 사군자 중에 하나로 다른 꽃들이 모두 시든 늦가을에 탐스런 꽃을 피우고 은은한 향기를 풍긴다. 정조는 이러한 국화의 기품을 ‘국화도’에 그대로 담았다. 정조가 국화의 성품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와 같은 명작을 그릴 수가 있었다. 미술평론가 최순우는 ‘국화도’에 대해 “화면에서 풍기는 높고 맑은 기품은 작가가 분명히 왕자(王者)라는 사실을 뒷받침해주고도 남음이 있으며, 그 원숙한 용묵(用墨)에서 오는 청정한 묵색의 미묘한 변화라든지 묘선에 드러난 비범한 필세와 그 속도감 있는 붓 자국에 스며있는 눈에 안 보이는 기운 같은 것은 가히 왕자지풍(王者之風)의 실감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파초도’는 굵은 줄기의 파초 한 그루가 시원스럽게 하늘을 향해 있는 그림이다. 넓고 푸른 잎에는 마냥 싱싱한 생명력이 넘쳐흐른다. 정조는 파초 잎을 부드러운 치맛자락처럼 그렸다. 그래서 그림은 넉넉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준다. ‘파초도’에는 그림보다 여백이 더욱 많다. 여백이 많기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림 왼쪽 위에는 정조의 호인 ‘弘齋’(홍재) 낙관이 또렷하게 찍혀있다.

정조는 마흔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등에 난 종기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온몸에 퍼져 죽음의 원인이 되었다고 하고, 영조의 부인인 정순왕후 일파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정조는 세손 때부터 늘 죽음을 두려워했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신변 보호를 위해 친위대 장용영을 운영할 정도였다. 영화 〈역린〉(逆鱗)은 정조의 이러한 모습을 잘 그리고 있다. ‘역린’은 용의 턱 밑에 난 비늘을 건드리면 죽임을 당한다는 전설에서 나온 말로 임금의 분노를 뜻한다. 정조에 대한 글을 쓰다 보니 불현듯 〈역린〉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참고자료 
설민석.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 세계사. 2016.
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 역사’ 경세원. 2014.
유홍준.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3’ 눌와. 2013.
최순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학고재. 2008.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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