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창희 디지털산업정책연구소 연구위원

노창희 디지털산업정책연구소 연구위원
노창희 디지털산업정책연구소 연구위원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 대한 주변의 반응은 이례적이었고 필자는 납득이 잘 되지 않았다. 굳이 극장에 찾아가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게 된 것은 평소 좋아하고 신뢰하는 연구자 두 분의 강력한 권유 때문이었다. 극장을 나서는 순간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라는 작품이 가진 힘 때문이었겠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을 것이다. ‘슬램덩크’에는 진정성으로 대변되는 1990년대적 에토스가 담겨 있고, 분노와 좌절이라는 1990년대적 파토스가 스며 있다. 성장으로 대변되던 1990년대적 역동성과 IMF 경제 위기로 인한 좌절을 모두 경험하고 사회인과 성인이 되어야 했던 세대에게 ‘슬램덩크’는 각별한 작품이었다. 

역주행 자체가 흔한 것은 아니지만 극장에서 역주행을 통해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 어려운 일을 해낸 것은 원작자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감독 및 각본을 동시에 맡은 ‘더 퍼스트 슬램덩크’다. 국내에서 2023년 1월 4일에 개봉해 2023년 3월 기준으로 아직까지 극장에서 상영하고 있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1월 마지막 주 주말에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역주행을 통해 거둔 놀라운 성과였다. 역주행은 마케팅만으로는 불가능한 문화적 현상이다. 영화의 경우 N회차 관람을 주도하는 팬층이 형성되지 않으면 역주행을 통한 관객몰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3월 5일 기준으로 384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대한민국에서 개봉한 일본 영화 작품 중에서 가장 많은 수의 관객이 극장을 찾은 작품이 되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국내 흥행 여부에 대해서는 전망이 엇갈렸다. ‘겨울왕국’을 제외하면 최근에 국내에서 크게 성공한 애니메이션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30대, 40대 남성 중심으로 팬덤이 형성되어 있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은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열풍을 주도하고 있는 대상은 1990년대 ‘슬램덩크’에 열광했던 30대와 40대 남성들이다. 하지만 지금의 슬램덩크 열풍은 특정 세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특정 계층의 팬덤이 열풍이 되기 위해서는 보편적으로 소구되는 정서가 있어야 한다. 도입부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기였던 1990년대적 정서가 담겨 있다. 그 정서는 단순히 텍스트에 담겨 있는 서사와 맥락 이외에 그 시대에 ‘슬램덩크’를 소비했던 체험과 연관을 맺고 있다. 

대한민국 콘텐츠의 위상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2020년대에 일본 애니메이션이 1990년대 대한민국의 정서를 소환한다고 얘기하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2020년대 대한민국의 대중문화는 1990년대적인 것의 영향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필자는 다른 글에서 1990년대적인 것과 2020년대적인 것이 역동적으로 조우할 때 새로운 잠재력을 발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했었다(노창희, (2020. 1. 27). 2020년대 대한민국 콘텐츠 경쟁력 높일려면 1990년대적 역동성을 소환하라. <아주경제>). 

1990년대에 대중문화를 활발하게 받아들이던 30대, 40대는 사회적으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연령대이고, 콘텐츠 소비를 포함해 문화 소비에 상대적으로 가장 많은 비용을 소비할 수 있는 세대다. 코로나 이후 극장 관객 수가 크게 줄어든 상황에서 N회차 관람을 할 수 있는 여력을 갖춘 30대와 40대가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 큰 지지를 보내고 있다는 것도 열풍의 원인일 수 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열풍을 눈여겨 볼만한 또 다른 이유는 특정 세대의 문화적 경험이 다른 세대의 공감을 얻어 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MZ세대가 1990년대의 대중문화를 포함한 레트로 문화를 향유해 왔다는 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각종 계층 간 분열과 반목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문화 텍스트를 소비하는 경험을 공유하고 이를 기반으로 상호 간의 이해를 높이는 일은 사회적으로도 긍정적이고, 산업적으로도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열풍을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 증대라는 측면에서 접근할 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최근 주목받고 있는 레트로 열풍과 함께 1990년대 대중문화의 역동성이 남긴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화는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지만 자양분이 있어야 하고 1990년대는 새로운 문화가 싹틀 수 있는 토양과 레퍼런스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시기다. 이와 더불어 아직도 1990년대에 생산된 문화 텍스트들은 그 자체로 경쟁력 있는 문화 상품으로 소비되고 있다.

디지털 대전환에 따른 플랫폼 중심으로 생태계가 형성되고 OTT 시장의 경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콘텐츠 수급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이와 함께 콘텐츠 제작에 필요한 원천 서사의 중요성은 높아지고 있으며 경쟁력 있는 원천 서사를 발굴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저명한 저서 제목을 빌려 얘기해 보면 대중문화는 차이와 반복의 미학이다. 새로운 형식의 창안이 어렵다면 과거에서 아이디어를 빌려 오는 것도 시의적절한 접근 방식이 될 수 있다. 마블을 중심으로 글로벌 미디어 사업자들이 이른바 ‘유니버스’를 구축하는 데 주력해 온 것도 매번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내기보다는 기반이 조성된 유니버스 내에서 작품을 창작하는 것이 서사 구축이나 이용자의 주목을 끄는 데 유리하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주인공인 글이지만 대한민국산 1990년대 콘텐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말로 글을 마치려 한다. 물론 지금까지도 다양한 시도가 이뤄져 왔고, 의미 있는 성과들도 있었다. 미디어 산업 연구를 업으로 삼고 있고 콘텐츠 비평에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연구자로서 한 가지 우려되는 지점은 미디어 분야가 체계화될수록 창의성이나 역동성이 발휘되기 어려운 환경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부분이다.

물론 기우이길 바라고 2022년에도 K-미디어 산업의 경쟁력과 위상은 다양한 콘텐츠가 입증해 줬다. 경기 침체로 인해 2023년에는 미디어 산업을 포함해 전산업의 상황이 어려워질 전망이다.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확보하기 어렵고 콘텐츠 투자비는 증가하는 상황에서 미디어 산업에 새로운 동력이 필요하고 이용자들에게도 힐링이 필요한 시기다. 1990년대적 역동성을 소환하게 되는 이유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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