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규 중앙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이찬규 중앙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이찬규 중앙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인간이 지구의 지배자로 자리잡은 지 약 600만 년이 지났다. 그동안 인간은 협력과 경쟁 속에서 계속 진화했고, 최근 20만 년간 언어와 문자로 찬란한 문명을 일구어 냈다. 비록 이 찬란한 문명 속에도 빛과 어둠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이 끊임없이 문명을 개척해 온 것은 그것이 인간에게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문명의 힘으로 지구상의 그 어떤 존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존엄한 존재가 됐다. ‘자유를 추구’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우리는 더 많은 문명의 빛을 누리기 위해 더 바빠지고, 점점 더 좁은 일에 몰두해야 했다. 문명이 점점 커지고 더 빛나는데, 정작 그것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한 나는 상대적으로 한없이 더 초라한 존재가 돼 가고 있는 것이다. 빛이 바랜 ‘자유’를 입고, 정해진 길을 가야만 하는 무기력한 인간으로서 말이다.   

인류 역사에 전환점이 될 인공지능 GPT는 현대인의 사회 생활에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될 것이 틀림없다. 20만 년동안 인간만이 점유하고 있던 고도의 ‘언어’를 다루는 또 다른 존재가 나타난 것이다. 한 명의 인간과는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지식 정보를 가지고 인간의 일을 대신해 주기 시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간의 삶을 통째로 뒤흔들어 놓을 만한 파괴력을 지닌다. 어떤 영역은 잘 못한다거나, 일부 정확하지 않다거나 하는 문제는 본질이 아니다. 그건 빠른 시간 내에 극복될 것이다.

아직은 무정(無情)한 존재여서 사람이 물어본 만큼만 답변해주고 있지만 조만간 유정(有情)한 존재가 돼 ‘나’라는 존재의 속성을 파악하고 내가 미숙하게 질문해도 능숙하게 대답을 해 줄 것이다. 현재 기술 발달의 추이로 보면 이 정도는 어렵지 않다. 심지어 이렇게 되기까지 기다리기도 전에 프롬프트 엔지니어(prompt engineer)라는 직업군이 등장해 당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최적의 질문과 명령을 해 줄 것이다. 

그림, 음악, 심지어 소설까지도 창작해내는 존재에게 인간만이 창의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도 머쓱해졌다. 인간은 적은 정보로도 추론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에 반해 AI는 비록 거대한 양의 정보를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인간보다 우수한 추론을 해 낼 수 있다. 여기에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는 로봇 기술은 인공지능과 결합해 점점 인간의 활동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다. AI칩이 보편화되는 시점이 온다면 대부분의 인간 육체 노동력은 쓸모가 없어질 것이 뻔하다.      

GPT와 관련해 짧은 시나리오를 써 보자. GPT로 인해 생겨날 ‘인간노동력 대체, 허위정보 확산, 데이터 편향성, 정보의 집중화, 윤리적 사안’과 사회적 문제는 좀 접어두고 한 개인으로서의 내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생각해 보자. 

인류의 문명은 더 찬란해지고, 우리는 더 편리해졌지만 정작 그것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한 ‘나’는 어떠한 존재가 돼 가고 있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다. 심지어 불평 없이 일해주는 존재가 나타났으니 이제 당신은 회사를 나가달라고 요청받는다. 회사를 나온 나는 정부의 기본소득으로 살아간다. 하루 종일 가상 공간 속에서 가상 인간으로 다른 가상 인간들과 교류를 하면서 지낸다. 어쩌면 나는 이미 인간과 대면해 감정 교류를 하면서 지낸다는 것이 힘들 수 있다. 고도로 복합적인 감정을 가진 존재로 진화한 나는 당연히 외로움을 느낄 것이다. 지금부터 40년 전하고만 비교해도 인간이 얼마나 더 외로워졌는지 생각해 보라. 인공지능은 인간 삶의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인 이 외로움을 더 가속화시킬 것이다. 인간이 이 외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지난 수십만 년 이상을 분투해왔는데 말이다.

나는 인간을 ‘완전성을 추구하는 불완전한 존재’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인간에게 추구해야 할 ‘완전성’이 상실된다면 나머지는 ‘불완전한 존재’일 뿐이다. ‘너는 이제 완전성을 추구할 필요가 없어. 그냥 불완전한 존재로 살아’라고 누군가 나에게 명령한다면 내가 남은 삶을 지루함이나 고통, 분노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나의 능력만으로 할 수 일이란 거대한 인공지능과 로봇 앞에서 하찮은 것들뿐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인간의 자존감과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식물과 동물의 중간 정도의 생명체로서 존재하는데 필요한 철학으로 무장하거나,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창조해 내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문명의 파괴자나 회피자가 돼야 할 것이다. 

누군가는 너무 비관적 시나리오라고 비판할 수 있다. 물론 낙관적 시나리오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작금의 사회를 보라. 우리 사회를 가득 메우고 있는 공기는 서로에 대한 불신과 혐오이지, 사랑과 관용이 아니다. 이익 추구이지 베품이 아니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비관적 시나리오의 뿌리는 GPT와 같은 인공지능이 아니라 인간의 과도한 탐욕 속에서 자라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인간들 속에서 때로 고통을 느끼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인간을 통해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존재로 진화돼 왔다. 앞으로 우리가 인간을 통한 행복을 기대하기 어렵다면 무엇을 통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가? 이쯤에서 ‘산업혁명’에 비견할 만한 ‘인간성 혁명’을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인공지능 GPT에 대한 열광 속에서 우리 사회가 닦아 가고 있는 길, 내가 가야 할 길이 도대체 어떤 길인지 모두가 한 번쯤은 진지하게 고민을 해 봐야 할 시간이 됐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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