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석 한국뉴욕주립대 팀장

김규석 한국뉴욕주립대 팀장

자본주의에서 세상이 작동하는 양상을 크게 ‘돈을 주는 진영’과 ‘돈을 받는 진영’으로 구분해 살펴볼 수 있다. 고용주는 피고용인에게 임금을 지급하면서 그에 상응하거나 때로는 그보다 더 큰 성과 창출을 기대한다. 돈을 받는 쪽은 그들이 돈을 주는 쪽에 제공한 부가가치 및 효용의 대가로 임금을 받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비즈니스 환경에서 사용되는 ‘드로우’라는 용어를 잠시 살펴보자. ‘드로우(draw)’는 말 그대로 ‘비겼다’는 뜻이다. 이는 허니문(honeymoon) 기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고용주과 피고용인이 ‘비기는 기간’을 의미한다. 즉, 피고용인이 신규 채용되거나 새로운 자리로 옮기게 되었을 때 고용주가 투입한 △임금 △교육훈련비 △복리후생 등 각종 자원에 상응하는 성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한시적으로 이를 양해하겠다는 것이다.

어느 조직이든, 어떤 직급과 지위이든 새로운 자리에 들어서자마자 받은 임금에 상응하는 성과를 즉시 만들어내는 것이 쉽지 않음은 명백하다. 대학은 어떨까. 특히 최고경영자로서 날마다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 자리에 있는 총장을 비롯한 소위 주요 보직자에게 ‘드로우’, 즉 ‘기다림의 시간’은 얼마나 주어질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지만, 충분한 여유를 갖기는 어려울 것이다. 보통 4년으로 한정된 그들의 짧은 임기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총장이 새로 임기를 시작한 뒤 어느 정도의 ‘드로우’가 해당 대학 조직 체계 내에서, 나아가 사회적으로 허락될지 자못 궁금하다. 이는 비단 총장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대체로 2년에서 4년의 매우 짧은 임기를 부여하는 부총장, 학장, 처장 등 대학의 주요 보직도 마찬가지다.

‘대학사회의 총체적 위기’가 현실화한 오늘 그리고 서울대, 고려대 등을 비롯한 주요 대학의 총장이 대거 새로 임기를 시작한 2023년에 들어서 총장을 비롯한 각 대학 주요 리더십의 중요성은 어떤 표현으로도 충분히 담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고 할 수 있다. ‘글로컬’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이번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고등교육 개혁 및 지방 분권화의 소용돌이, 그리고 그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글로벌 교육‧연구 경쟁력 강화’, ‘고등교육 재정지원 사업 체계 개편’, ‘등록금 인상 등 재정 확충’, ‘국내외 학생 유치 경쟁’, ‘이공계 수험생의 문과 침공’과 ‘챗GPT‘까지 굵직한 고등교육계의 현안은 각자 나름의 담대한 비전을 앞세우며 임기를 시작한 대학 총장이 취임식을 마친 직후 데이-원(Day 1)부터 맞닥뜨려야 하는 난제 중의 난제다.

그러나 그들에게 허락된 시간은 너무도 짧다. 어떠한 제도와 경로를 통해 총장으로 선출되더라도 그들이 리더로서 마음껏 대학 발전을 위해 뛸 수 있는 시간은 대체로 4년으로 고정돼 있다. 임기를 시작한 뒤에 부득불 겪을 수밖에 없는 ‘드로우’, 그리고 통상 임기 4년 차에 들어서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레임덕을 고려하면 총장이 대학 최고위 리더이자 의사결정권자로서 유의미한 본질적 변혁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간은 이에 훨씬 미치지 못할 것이다. 진정한 혁신을 꿈꾸는 총장의 리더십이 과연 그 짧은 시간 내에 매우 다양한 구성원과 이해관계자의 목소리가 뒤섞여있는 ‘느슨하게 결합 된(loosely-coupled)’ 대학 조직의 어디까지 미칠 수 있을까.

총장 임기제의 문제를 지적하는 오피니언 리더 중에서, 가장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을 꼽으라면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을 역임한 김도연 전 포스텍 총장일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울산대학교에서 총장의 3연임을 얼마 전 발표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굳이 그의 의견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대학 사회가 전례 없는 변곡점을 지나는 이 시점에, 대학 혁신‧발전 로드맵을 구상하고 단계별로 달성해야 할 과업을 설정하며 이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대학의 내부 구성원과 외부의 주요 이해관계자와 소통함으로써 합의(consensus)를 만들어내고 조직의 역량을 집결하는 일은 매우 장기적 안목과 헌신으로 지속성 있게 관철해야 하는 어젠다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대학은 대부분 ‘긴 호흡의 리더십’을 허용하는 데 인색하다.

교육공무원법과 사립학교법으로 정하는 ‘대학 총장 4년 임기제의 역설’은 크게 두 가지 양상으로 드러난다. 첫째, 대학의 리더가 매우 훌륭한 업적을 세우고 존경받는 성품과 사회적 덕망을 갖췄더라도 ‘드로우 기간’이 지난 뒤 그리 머지않아 총장실을 비워줘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다음 총장이 전임자의 뜻을 계승해 연속성 있는 정책과 혁신을 추구하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에서 그런 일이 쉽게 일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둘째, 대학의 발전을 위해 충분한 역할을 하기에는 실력과 인품이 부족한 총장이라면, 그들의 재임 기간은 말 그대로 ‘잃어버린 4년’이 돼 버리고 만다. 혹자는 ‘능력과 덕망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총장이 되나?’라고 반문하겠지만 막상 그 자리에 오른 뒤에 적지 않은 실망감을 안겨주는 사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 학계에서 출판된 관련 문헌을 살펴보면, 대학 총장 리더십에 관한 저작물이 희소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를 연구주제로 삼지 않는 데는 반드시 어떤 이유가 있을 터. 필자는 그 이유를 ‘총장의 짧은 임기’에서 찾는다. 4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충분한 업적을 창출하는 효과적인 리더십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고 성과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특정 총장의 탁월한 리더십 덕분이었는지를 판별하기 어려우며, 심지어 ‘총장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라는 회의론까지 있기 때문이다. 잘하는 사람은 계속 잘하게, 못하는 사람은 당장 내일이라도 그만두게 할 수 있는 대학의 리더십과 거버넌스 제도를 갖추는 것. 우리나라 대학이 크나큰 비전을 앞세워 원대한 발전을 풍성하게 꿈꿀 수 있게 하는 필요조건이다.

대학을 위기에서 구원할 리더십을 그리는 마음으로 외쳐본다. “총장님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4년뿐이라 저희는 억울합니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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