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 가천대 석좌교수

이기우 가천대 석좌교수
이기우 가천대 석좌교수

나에겐 결코 잊을 수 없는 은사님이 두 분 있다. 거제 연초중학교 1학년 담임 이명걸 선생님, 3학년 담임 김영진 선생님이다. 이명걸 선생님은 부산대 사범대학 수학과를 졸업하고 막 첫 발령을 받으셨으니까 나는 그 분의 첫 제자인 셈이다.

이명걸 선생님은 나에게 “기우야, 니 부산고 가라!”라고 처음으로 말해 주신 분이다. 나는 중학교 1학년 첫 반장을 맡았고, 학년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덕분에 졸업할 때까지 3년 내내 수업료와 기성회비가 모두 면제였다. 선생님은 모교인 부산고등학교에 내가 입학하기를 적극 권하며, 내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 주셨다.   

거제도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이명걸 선생님의 그 말씀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를 일깨워 주었다. 나는 처음으로, 부산이라는 큰 도시로 나가 꿈을 펼칠 희망을 갖게 되었다. 1학년 말에는 선생님이 나를 데리고 부산에 가기도 하셨다. 선생님은 나에게 부일장학회 장학생 선발 시험을 보게 하셨다. 내가 장학생이 되어 좀 더 풍족하게 학교에 다니길 바라셨다. 부산대 사범대학 수학과 교수로 계셨던 선생님의 형님이 부산 서면에 사셔서, 그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푹신푹신했던 이불이 지금도 생각난다.

다음 날, 시험 보러 가기 전 시간이 많이 남았다. 선생님은 나를 중앙동 현대극장으로 데리고 가서, 상영 중이었던 펄벅의 「대지」를 보여 주셨다. 나의 첫 영화였다. 처음 보는 대형 스크린에 영사기 불빛이 쏟아지며 왕룽 일가의 삶이 펼쳐지고, 황량한 대지 위에 가득한 메뚜기 떼! 그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영화를 보고 나와 극장 근처의 유명한 제과점에 가서 빵을 사 주기도 하셨다. 선생님의 세심한 배려와 사랑은 시골 소년인 나에겐 감동 이상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장학생 선발 시험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거제도에서는 나름 공부를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큰 도시의 학생들에 비해서는 부족했다. 나는 괜찮았지만 선생님께 면목이 없었다. 나를 위해 장학회를 알아봐 주시고, 부산에 데리고 와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시험을 보게 해 주신 선생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했다는 것이 아쉽고 분했다고 할까. 그러나 선생님을 통해 나는 성큼 성장할 수 있었다. 거제도를 벗어나, 부산이라는 새로운 공간을 열어 주고, 더 큰 세상을 꿈꾸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중학교 3학년 때의 김영진 선생님도 내게 지속적으로 용기를 주신 분이다. 고등학교 입학원서를 써야 할 때가 되었을 무렵, 선생님은 부산고 원서를 흔쾌히 써 주셨다.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넌 반드시 합격한다. 걱정 말고 마무리 잘해라. 그리고 앞으로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라. 넌 충분히 가능해!”

선생님은 나를 볼 때마다 항상 애정 어린 목소리로 “기우, 너는 뭘 해도 잘할 거다!”라는 말씀을 해 주셨다. 나는 선생님을 통해 누군가 나를 믿어 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배웠다. 가능성은 본인의 각성으로도 깨어나지만, 믿고 지지해 주는 사람이 있을 때 더 크게 피어날 수 있다. 선생님 덕분에 나는 부산고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 해는 유독 경쟁이 심해서 경남고등학교보다 커트라인이 몇 점이나 더 높았다. 그래서 그런지 거제도 11개 중학교에서 32명이 시험을 쳤는데 나 혼자만 붙었다. 모두가 선생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 후, 세월이 한참 지난 뒤 김영진 선생님을 다시 뵌 적이 있다. 교육부 교육환경개선국장으로 이해찬 장관을 모시고 있을 때였다. 스승의날 행사로, 간부들의 옛 은사들을 한 분씩 초청했는데, 나는 김영진 선생님을 모셨다. 선생님은 김해중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근무하고 계실 때였다. 선생님도 무척 좋아하셨고, 나도 그날은 종일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더 재미있던 일도 있었다. 이날 행사를 양재동 The-K호텔(당시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진행했는데, 행사 도중 국장들이 노래를 부르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나도 목소리를 뽐내려 무대로 나갔다. 그런데 이해찬 장관님께서, 내가 무대에 서자마자 “이 국장은 노래를 부르지 말고 콩트를 하세요!”라고 말했다. 평소 나는 업무 진행이 매끄럽지 않거나, 첫 회의라 분위기가 서먹할 때마다 우스개를 하곤 했는데, 이 장관님은 이런 점을 좋아하셨다. 나는 분위기를 전환시키거나 띄우는 데 나름 재주가 있고, 제법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다보니 인기가 좋은 편이었다. 아무리 어려운 업무도 긴장을 풀고 서로 웃으면서 논하면,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이날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한 가지만 하려다 앵콜도 받아 두 가지 설(說)을 풀었다. 갑작스런 요청이었지만, 나는 최선을 다했고 분위기를 급격히 화기애애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다음 해에는 이명걸 선생님을 모시려고 수소문을 했는데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 사이 선생님이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아쉽고 슬픈 마음에 한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사실 1996년 봄에 이명걸 선생님을 뵌 적이 있었다. 내가 부산시 부교육감으로 일할 때, 이명걸 선생님은 모교인 부산고 수학 선생님으로 재직하고 계셨다. 연락을 드려 날을 잡고 식사를 했는데, 선생님께서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그때도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과 열정은 그대로였다. 제자를 사랑하고 잘 가르치는 것은 물론, 자기 몸을 던져 제자를 위하셨던 예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데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나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너무 늦었다는 자책과 회한이 가슴을 저몄다. 

나는 선생님들께 빚진 마음을, 학생들을 위한 마음으로 보은하고자 했다. 내가 대학 총장으로 재직했던 14년 동안, 나는 두 분 선생님께 배운 대로 학생들을 대했다. ‘학생의 행복과 성공’을 대학의 발전 목표로 설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최선을 다해 두 분 선생님의 길을 따르려 했으나, 내가 어찌 그 분들의 마음과 정성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부족함을 느낄 뿐이다. 제자들을 대할 때 선생님들이 보여 주셨던 조건 없는 사랑과 헌신, 사람의 가능성에 대한 선한 믿음. 그것은 항상 내 가슴 속에 가장 귀한 가치와 덕목이고, 나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다. 

참, 그 콩트가 뭐냐고? 고양이가 배가 너무 고파 먹이를 찾고 있을 때, 쥐가 나타났다. 고양이가 옳다구나 하고 잡으려 하자, 쥐는 바로 쥐구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밖에서 아무리 야옹거리며 겁을 주어도 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고양이는 어떻게 하면 쥐를 잡을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그렇게 몇 분 동안 숨소리도 내지 않고 쥐죽은 듯 있다가, 갑자기 멍멍! 개소리를 냈다. 그러자 쥐가 의기양양하게 밖으로 나오는 게 아닌가, 당연히 바로 낚아채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쥐는 고양이와 상극인 개소리가 나니, 고양이가 당연히 없을 줄 알았던 것이다. 이때 고양이의 말이 가관이다. “나도 이제 2개 국어는 해야 먹고 살 수 있겠구나!” 

나머지 한편은 다음 기회에.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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