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량적 평가에 치우쳤던 국내 학계, 부실 학술지 유혹에 빠지기 쉬워
2017~2021년 정부 지원받은 SCI급 논문 중 15.9%는 ‘부실 의심 학술지’ 게재
OA 등장과 함께 부상한 부실 학술지…가이드라인 구축 필요성 제기돼
전문가들 “양적 평가에서 질적 평가로의 전환 필요…동료 평가 강화해야”

그간 국내 학계는 학위 취득, 취업, 연구비 지원, 고용유지 등의 평가에 정성적 평가보다는 정량적 평가를 활용해왔다. 질보다 양이 중요해짐에 따라 손쉽게 논문을 게재할 수 있는 '부실 학술지'의 유혹에 빠지는 연구자도 늘어나는 추세다. (사진=픽사베이)

수준 낮은 논문 출판, 논문 표절, 갑질, 연구비 유용 등 각종 사건·사고로 인해 국내 학계가 멍들고 있다. 지성의 요람이라 불렸던 대학이지만 최근 대학을 둘러싼 추문들은 반지성주의가 팽배한 곳은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다. 학계를 좀먹는 원흉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근본에는 연구자의 무너진 연구윤리가 자리잡고 있다. 외적인 성장을 통해 한국이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지만 진정한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내적인 부분도 그 격을 높여야 한다. 내적인 부분이라 함은 문화, 시민의식 등 다양한 부분이 있지만 이번 기획 연재에는 ‘학계’를 중심으로 문제점과 해결책, 나아갈 길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한국대학신문 백두산 기자] 연구자의 역량을 파악하는 방법으로는 크게 정량적 평가와 정성적 평가가 존재한다. 쉽게 말하자면 양(Quantity)으로 평가하느냐, 질(Quality)로 평가하느냐의 차이다. 정량 평가의 경우 명확한 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 따라 점수를 부여하는 방식이다. 반면 정성 평가는 결과물이 도출된 배경부터 과정, 결과 등을 고려해 주관적으로 평가하는 방식이다.

그간 국내 학계는 정성적 평가보다는 정량적 평가를 활용해왔다. 학위 취득, 취업, 연구비 지원, 고용 유지 등의 평가가 대부분 객관적인 지표를 기준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이는 평가자 입장에서도 제일 손쉬운 방식이다.

그러나 학술에 대한 정량적 평가는 부작용을 초래할 가능성도 높다. 게재 논문 수가 제일 중요해짐에 따라 연구자가 실적 부풀리기의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학계의 실적 부풀리기는 부실 학술지를 매개로 삼아 이뤄지고 있다.

부실 학술지들은 표절이나 오류투성이 논문, 학문적으로 가치가 없는 논문이라 할지라도 불투명한 심사 절차를 통해 논문을 출판한다. 부실 학술지 종류로는 유명학술지와 이름만 비슷한 ‘위조 학술지’, 돈만 내면 쉽게 논문을 실어주는 ‘약탈적 학술지(predatory journal)’, 한 번에 수백 편 논문을 대량 발행하며 간소화된 심사만 거치는 ‘대량 발행 학술지’ 등이 있다.

문제는 최근 이런 부실 학술지에 게재된 국내 논문이 빠르게 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 투고한 상당수의 연구자들이 국내 주요 대학에 재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 2017~2021년까지 게재된 논문 중 15.9%는 부실 학술지에서 출판 = 지난해 10월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은 ‘한국연구재단 연구개발(R&D) 사업 논문 성과 현황’ 자료를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오픈액세스센터에 의뢰해 분석한 자료를 발표했다.

자료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1년까지 5년간 정부 지원을 받아 출판된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급 논문의 15.9%가 ‘부실 의심 학술지’에 게재된 것으로 나타났다. 부실 의심 학술지 게재 논문은 5년간 4배 가까이 폭증했으며, 해당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한 상위 대학은 서울대를 비롯한 경북대, 부산대, 성균관대, 고려대 등 국내 주요 대학들이었다.

5년간 연구재단의 R&D 지원을 받은 SCI급 논문 12만 6505편(중복 연구 제외) 중 부실 의심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은 2만 103편(15.9%)이었으며, 게재된 논문 수는 2017년 1648편, 2018년 2348편, 2019년 3655편, 2020년 5821편, 2021년 6631편으로 매년 증가했다.

(자료=이인영 의원실)
(자료=이인영 의원실)

부실 의심 학술지에 발표된 논문이 많은 상위 10개 대학은 서울대(903편), 경북대(841편), 부산대(801편), 성균관대(798편), 고려대(717편), 중앙대(700편), 연세대(681편), 경희대(675편), 한양대(627편), 전남대(503편) 순으로 집계됐다.

최근에는 스위스 오픈액세스 출판사인 MDPI처럼 학계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대형 국제학술지 출판사도 부실 학술지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MDPI는 425종의 학술지를 발간하는 대형 출판사다. 이 의원실에 따르면 MDPI 출판사 계열 학술지에 한국인 연구자가 게재한 논문 수는 2016년 1229편에서 2020년 1만 982편으로 5년 만에 893%나 증가한 것으로 분석됐다.

윤철희 과학학술지편집인협의회 출판윤리위원장(서울대 동물생명공학 교수)은 지난 6일 ‘오픈액세스와 부실학술지’ 온라인 공개 세미나에서 “MDPI 소속 학술지는 대체로 논문 초안을 받고 20일 안에 첫 번째 검토를 끝낸다”며 “논문 검토를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건 말이 안 되는 기간”이라고 지적했다.

■ “바보야, 문제는 OA가 아니야”…가이드라인 구축이 시급한 이유 = 다소 안타까운 점은 부실 학술지의 상당수가 오픈액세스(OA)를 기반으로 하면서 대중에게 ‘오픈액세스 학술지=부실 학술지’라는 인식이 고착화된 점이다.

그러나 본래 OA는 세금이 투입된 연구의 결과물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유럽에서 시작된 운동이다. OA가 잘 활용된 예로는 코로나19 백신 개발을 들 수 있다. 각국의 연구자들이 데이터를 공유함으로써 코로나 바이러스 염기서열 분석을 고작 1달 만에 해냈다.

유럽은 공공·민간 보조금을 지원받은 연구 결과에 대한 모든 학술 출판물은 OA 학술지·플랫폼에 게시돼 즉시 공개하고 있다. 미국은 공공 자금을 지원받아 수행된 R&D 과제의 결과물로 나온 논문을 즉시 대중에게 무료 공개하는 공공접근 정책을 2025년까지 마련하라는 정책권고안을 발표했다.

유럽과 미국의 주요 연구재단 또한 이 같은 움직임에 동참하고 있다. 유럽의 웰컴트러스트재단, 미국의 빌앤드멀린다게이츠재단이 자신들에게 연구비를 지원받아 나온 논문은 반드시 OA 학술지에 게재하도록 요구하고 있으며, 전 세계 상위권 대학들도 동참하고 있다.

이에 따라 생긴 OA 저널은 온라인으로만 출판될 뿐만 아니라 출판에 필요한 비용을 저자가 부담해 출판 과정 자체가 간단한 편이다. 즉, 학술 논문의 상업성보다 공공성을 중시한 모델이다.

문제는 OA의 등장 이후부터 연구자가 출판사에 돈만 내면 아무리 질이 떨어지는 논문이라도 학술지에 실어주는 ‘부실 학술지’가 대거 등장했다는 점이다.

이들 부실 학술지는 동료 심사나 편집국의 관리 없이 수준 낮은 논문들을 무분별하게 출판하거나 높은 금액의 논문처리비용(APC)을 받고 심사 기간을 단축시켜 주는 등 학계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윤 위원장은 본지와의 통화에서 “부실 학술지들은 집요하게 논문이 게재될 수 있도록 심사자를 유도한다”며 “이런 식으로 학술지가 운영되면 에디터도, 리뷰어도 아무 의미가 없다. 이 같은 문제로 인해 에디터에서 사임한 사람들도 많다”고 말했다.

윤 위원장의 설명에 따르면 부실 학술지가 생기는 원인은 OA 출판사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한계에 있다. 전통적인 학술지 출판사들은 논문이 필요한 기관 혹은 개인 독자로부터 구독료를 받아 왔다. 우수한 논문일수록 구독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각 저널들은 논문의 질을 높이는 데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러나 OA 학술지 출판사는 수익을 낼 수 있는 방법이 APC뿐이다. 그 전에는 멤버십에서 수익이 창출됐지만 이 시스템이 OA의 등장으로 무너지면서 악용하는 사례가 늘어난 것이다. 이 때문에 윤 위원장은 ‘OA 또한 하나의 비즈니스 모델’이라고 정의했다.

윤 위원장은 “(부실 학술지는) 논문에 목마른 사람을 타겟으로 한다”며 “피싱 전화처럼 대부분의 사람은 속지 않지만 신진 연구자이거나 (정량적인) 부분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유혹에 빠지기 쉽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학계에서는 논문 투고와 관련된 가이드라인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연구자들 입장에서는 잘 알려진 학술지를 제외하고 어느 곳이 건실한 학술지인지, 부실 학술지인지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9월 한국연구재단이 국내 3268명의 대학교수 등 연구책임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해외 부실 의심 학술지·학술대회’의 존재를 모르는 비율이 14.1%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는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에서 건전학술활동지원시스템(SAFE)을 통해 의심스러운 학술지의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에서 운영 중인 건전학술활동지원시스템(SAFE) 화면. (사진=홈페이지)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에서 운영 중인 건전학술활동지원시스템(SAFE) 화면. (사진=홈페이지)

■ “이제는 학계도 변해야 할 때…균형·조화 맞춰야” = 국내 학계의 전문가들은 부실 학술지의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양적 평가에서 질적 평가로 전환하고, 동료 평가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도권 사립대 A교수는 “논문 중심의 정량 평가 방식의 평가시스템을 한순간에 정성 평가로 전환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며 “정성 평가 비율을 조금씩 늘리면서 질적 평가의 주관성을 보완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한국 대학들이 글로벌 대학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연구업적 평가제도를 국제 기준에 맞게 정성 평가 방식으로 개선해야 한다”며 “동료 평가를 활용한 질적 평가제도 도입을 확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현재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일본, 캐나다 등 과학 선진국들은 공통적으로 연구자 동료들이 연구 성과를 평가하는 ‘동료 평가’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다만, 몇몇 전문가들은 정량 평가에서 정성 평가로의 전환만이 답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수도권 사립대 B교수는 “질적인 평가를 위해 동료평가가 제시되지만 온정주의와 편파성도 문제가 될 수 있다”며 “현재로서는 획일적인 양적 평가를 지양하고, 질적 평가와 균형·조화를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윤 위원장은 이에 더 나아가 부실 학술지에 게재하는 행위를 막기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부실 학술지에 게재해 실적을 올리는 행위를 적발·관리할 수 있는 부서가 필요한데, 각 기관이 운영하는 방식을 통해 부실 학술지 문제에 대응해야한다”며 “여기에서 일할 전문인력도 양성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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